'세종대왕님이 우신다'…한글 파괴 앞장서는 지자체들

입력 2018-10-09 09:01
수정 2018-10-16 09:26
'세종대왕님이 우신다'…한글 파괴 앞장서는 지자체들

행정용어 외래어 빈번, 한글+외국어 무분별 혼용

지역 소개도 마찬가지, "공무원 교육·언어 순화 힘써야"



(전국종합=연합뉴스) "공무원들은 평소에 정말 이런 용어를 쓰고 있나요? 솔직히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와 반포를 기념하는 한글날이 572돌을 맞았지만, 지자체는 여전히 외래어가 뒤섞인 알쏭달쏭한 행정용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글 대체가 가능한 행정용어를 외래어로 쓰거나, 한글과 외국어를 혼용해 신조어를 만드는 등 지자체의 한글 파괴가 도를 넘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 세계가 인정하는 가장 과학적인 문자를 갖고도 굳이 의미가 불분명한 외래어를 행정용어로 고집하는 지자체의 관행에 개선이 요구된다.



◇ 지역 소개에 꼭 외국어를 사용해야 하나요?

'블루시티(Blue-city) 거제', '로맨틱(Romantic) 춘천', '원더풀(wonderful) 삼척', '레인보우(Rainbow) 영동', '드림허브(Dream hub) 군산'.

전국 지자체가 시·군 누리집(홈페이지) 등에 지역을 소개할 때 넣은 문구를 간추렸다. 열거한 지자체는 외국어 사례 중 극히 일부다.

이들 지자체는 지역 명소와 관광지·특산품·산업 등을 함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문구를 골라 지역 이름 앞에 넣었다고 설명한다.

'블루시티'라는 용어를 쓴 경남 거제시 관계자는 "푸른 바다를 낀 관광휴양 도시와 조선산업을 이끄는 산업일꾼을 상징하는 '블루칼라'를 표현할 수 있는 이름을 사용했다"고 말했다.

'레인보우'로 지명을 소개한 충북 영동군 관계자는 "빨강(사과)·주황(감)·노랑(국악)·초록(푸른 산)·파랑(맑은 물)·남색(포도)·보라(와인)로 상징화해 디자인했다"고 밝혔다.

새로운 이름을 만든 지자체는 꽤 만족스러운 모습이지만, 주민들은 '저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주를 이룬다.

'드림허브'라는 소개가 붙은 전북 군산에 사는 박모(42)씨는 "뉴스를 잘 보지 않아서 도시 이름에 그런 소개가 붙었는지 몰랐다"며 "시민들이 알기 쉽게 한글로 소개를 해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 '실링액·가내시·성료'…도대체 무슨 뜻이야?

'실링액을 가내시할 것' 분명 우리말 같은 데 도무지 뜻을 이해하기 어렵다.

실제 행정기관 공문서 등에서 종종 사용하는 용어라고 한다.

이 말은 '최고 한도액을 미리 통보할 것'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주로 건축 분야에 자주 등장하는 실링액은 '상한·천장·한도'를 뜻하는 '실링(Ceiling)'에 액수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액'이 합쳐진 것이다.

'임시 통보'라는 의미의 가내시는 '공식적으로 알리기 전에 몰래 알림'이라는 뜻의 '내시(內示)'에 접두사 '가(假)'를 붙여 만든 용어다.

전국 곳곳에서 축제가 이어지는 이맘때마다 지자체 홍보자료에 빠지지 않는 '성료'라는 문구도 마찬가지다.

'성대하게(盛) 끝마쳤다(了)'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이 문구는 일상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 용어다. 국립국어원 온라인 표준국어대사전에도 없는 말이다.

'마무리', '성공', '잘 마쳐' 등으로 쉽게 풀어써도 될법한 데도 자치단체 공식문서에 관행적으로 사용된다.

정체불명 외래어는 특히 지자체 행사와 기획 때 어김없이 등장한다.

경기도에서는 예비 창업자가 전문가와 투자자 앞에서 사업성을 검증받는 행사를 'UP 창조오디션'이라는 이름으로, 농업인에게 농장을 빌려주고 작목을 직접 생산·유통하는 체계를 '팜 셰어'라고 부른다.

한글과 외국어가 뒤섞인 축제 이름은 굳이 열거하지 않아도 관광객이 먼저 지적할 정도다.

충남도 한 지자체 관계자는 "일반인에게도 비교적 익숙한 단어라고 생각해서 별다른 거부감 없이 용어를 사용했다"며 "국어사전에 없는 말인지 몰랐다"고 말했다.



◇ '외래어는 그만!'…용어 순화하는 지자체들

한글날을 전후해 무분별한 외래어 사용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자, 일부 지자체는 행정용어 순화에 힘쓰고 있다고 밝혔다.

'가장 한국적인 도시'를 지향하는 전북 전주시는 지난 7월 외래어와 한자는 물론이고 권위적인 용어를 바로 잡겠다고 발표했다.

의미가 불분명한 한글과 외래어를 혼용하는 대신, 시민 누구나 알아듣기 쉽고 이해할 수 있는 우리말을 행정용어에 사용하겠다는 것이다.

시는 행정용어 사용실태를 조사하고 다른 기관의 순화·개선 사례를 수집하기로 했다. 고친 용어는 시민에게 의견을 구해 공문서 등에 반영할 예정이다.

광주시도 지난달 17∼18일 공무원 160여명을 상대로 공공언어 바로 쓰기 교육을 했다.

시는 교육 내용을 토대로 공문서 작성 시 지켜야 할 원칙 및 규정을 마련하고 한자로 된 행정용어를 한글로 고치도록 개선안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바로잡은 용어는 가료→치료, 가용하다→쓸 수 있다, 거양→올림, 금명간→곧·오늘내일, 내용 연수→사용 연한, 당해→그, 동년·월·일→같은 해·달·날, 별건→다른 건, 불상의→알 수 없는, 성료→성공적으로 마침, 수범 사례→모범 사례, 시건장치→잠금장치, 양도양수→주고받음, 적기→알맞은 시기, 초도순시→첫 시찰, 패용→달기, 하구언→하굿둑, 행선지→목적지 등이다.

신환철 전북대 행정학과 명예교수는 "지자체 등 일부 행정기관에서 여전히 일반 국민 정서에 맞지 않는 한문 등 외래어를 혼용한 행정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며 "국민이 이해하기 쉬운 용어를 사용하도록 공무원을 대상으로 한 교육과 행정용어 순화 작업이 지속해서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홍인철, 양지웅, 이승민, 이정훈, 이재림, 우영식, 변지철, 장덕종, 최찬흥, 김재홍, 류성무, 정경재 기자)

jay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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