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답지 않았다고 무죄? 성폭행범 태연함은 왜 안 따지나"

입력 2018-08-21 08:15
수정 2018-08-21 08:36
"피해자답지 않았다고 무죄? 성폭행범 태연함은 왜 안 따지나"

안희정 1심 무죄 판결에 두 번 우는 직장 내 성범죄 피해자들

작년 성폭력 상담 30%가 회사에서 발생…"가해자 절반은 상사"



(서울=연합뉴스) 현혜란 기자 = "직장 상사에게 성폭행을 당할 뻔하고 나서, 함께 택시를 탔다는 이유로 그날 밤 호텔 방안에서 있었던 일이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제 두 눈이, 제 온몸이 그날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단 말입니다."

대기업에 다니는 A씨는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등을 저지른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최근 1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는 것을 보고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안 전 지사의 사건이 과거 자신이 겪은 일과 판박이처럼 비슷했기에 무죄 판결을 예상하면서도 그사이 세상이 조금은 바뀌지 않았을까 일말의 기대를 걸고 있었기 때문이다.

A씨는 2014년 1월 자신의 상사 B씨를 강간미수 혐의로 경찰에 고소했다. 경찰은 "피해자와 피의자의 진술이 일치한다"며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사건을 넘겼지만, 검찰은 B씨를 기소하지 않았다.

검찰 조사를 받으면서 A씨가 귀에 박히도록 들었던 말은 "이거 법원에 가도 유죄가 안 나온다"는 것이었다. 범행 이후 A씨가 B씨와 택시를 타고 집에 갔고, 태연하게 연락을 주고받는 등 말과 행동이 '피해자답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제 커리어에 그 사람이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칠지 모르니 머리를 굴린 거죠. 일단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어떻게 나오는지 보자는 식으로요.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그런 피해자는 정형화된 피해자가 아니라고 하네요."

A씨는 "가해자가 범죄를 저지르고 나서 태연한 척 행동하는 것은 '그럴 수 있다'고 여기면서, 피해자가 사건 이후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하는 것은 왜 '피해자답지 않다'고 문제 삼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토로했다.

여성계에서는 한국 사회에 A씨의 사례처럼 직장 내 성폭력이 만연해 있는 와중에 나온 안 전 지사의 무죄 판결이 다른 성범죄 피해자들을 위축시킬 수 있다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지난해 한국성폭력상담소에 접수된 성폭력 상담 1천260건 중 375건(30%)이 직장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당한 일을 상담한 것이었다. 피해자-가해자 관계 유형 중 단일 유형으로 가장 높은 수치다.

가해자가 상사인 경우가 50%(188건)로 절반을 차지했고, 동료 19%(70건), 고용주 16%(59건), 고객 7%(25건) 순이었다. 피해 유형은 강제추행이 48%(179건)로 절반에 가까웠고, 강간과 강간미수가 16%(59건)를 차지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최란 팀장은 "안 전 지사의 재판 과정에서 범죄와는 무관한, 피해자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의 평가까지도 실시간으로 중계되다 보니 최근 상담을 청해온 직장 내 성범죄 피해자 사이에 위축된 분위기가 있다"고 전했다.

온·오프라인에서 피해자를 향해 쏟아지는 2차 가해가 자신에게도 적용되는 것으로 생각하며 동일시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신고해봤자 소용없는 것 아니냐"며 피해를 밝히기를 꺼리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게 최 팀장의 설명이다.

최 팀장은 "피해자 입장에서는 사회적으로 알려진 안 전 지사 사건마저 법원에서 무죄를 받았는데 자신의 사건은 유죄를 인정받기 더 어렵지 않겠느냐며 불안해할 수 있다"며 "당분간은 이런 현상이 지속될 것으로 예상돼 우려된다"고 말했다.



runr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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