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는 아직 해방되지 않은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입력 2018-08-14 14:57
"저희는 아직 해방되지 않은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태평양전쟁한국인희생자유족회 보훈단체 인정받지 못해

쓸쓸한 광복절…"유공자·유족 대우 명예회복 해줘야"

(춘천=연합뉴스) 이상학 기자 = "우리는 아직도 해방되지 않은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광복절을 하루 앞둔 14일 홍영숙(73·여) 태평양전쟁 한국인희생자유족회장의 얼굴에는 서운함이 가득하다.

수십 년간 외면받고 소외됐던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 희생자들의 상실감이 광복절을 맞아 더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강원도 춘천에 기반을 둔 태평양전쟁 한국인희생자유족회는 일본 내 강제징용 희생자 유해를 되찾아 오는 등 30년 가까이 징용 피해자들의 위령 활동과 명예회복을 위해 힘써 왔지만, 보훈단체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1990년 징용 피해자인 고 김경석 전 태평양전쟁 한국인희생자유족회장이 주축이 돼 피해자와 유족 등 700여 명이 모여 결성한 단체다.

김 전 회장은 17세 때인 1943년 일제에 의해 가와사키 제철소로 강제 징용됐다가 파업을 주도한 혐의로 온갖 고문을 당하고 1년 8개월 만에 귀국했다.

이후 1992년과 1996년 일본 도야마현 재판소에서 일제 강제동원에 의한 피해보상 등을 요구하는 재판을 제소해 역사적인 승소와 보상을 끌어내기도 했다.

또 1991년 일본 각지에 흩어져 있던 조선인 강제징용자의 유해 513위를 수습해 매년 위령제를 지내는 등 오직 이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한평생을 살아왔다.

홍 회장은 2006년 고인이 된 남편 김경석 전 회장의 아내로, 그의 뜻을 이어받아 단체를 이끌고 있다.

그는 "우리나라는 일부러 식민지 시절을 기억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다"며 "최근 여러 가지 특별법으로 유공자를 만들고 있지만, 200만 명이 넘었던 피해자는 왜 유공자로 인정하지 않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고 답답해했다.

홍 회장은 남편의 사후 13년째 유족회를 맡아 일하고 있지만, 여전히 보훈단체로 인정받지 못한 현실은 늘 그대로다.

그나마 강원도가 10년 전 보훈회관 한편에 마련해준 사무실이 위로가 되지만, 지원금이 전혀 없다 보니까 프린터 잉크값 1만4천원짜리도 사재를 털고 있다.



나이가 점점 들어가는 데다 억울함을 증언해줄 피해자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고 있지만, 국민 기억 속에 잊혀선 안 된다는 역사적 의무감으로 버티고 있다.

이따금 사무실에 들러 위로와 응원을 보내는 피해자와 가족들 성원에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사무실을 찾은 최복년(91·여) 어르신은 "홍 회장이 그동안 너무 힘들게 일해 와서 그만 일을 접으라고 수차례 권유했다"며 "정부와 국민 무관심으로 너무 많이 힘들었지만, 고인이 된 김 전 회장과 홍 회장이 아니었으면 여기까지도 오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1935년께 인천의 초등학교를 졸업한 15세에 일본에 속아 도야마의 비행기 부품공사에서 일했다.

최씨는 일을 하다 손가락이 절단되는 고통을 참으며 어렵게 살았지만, 한 푼의 임금도 받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는 해방을 앞두고 일본인들이 짐도 챙기지 않은 채 함경북도 원산에 몰래 내려놓고 돌아간 것을 생생하게 기억하며 눈물을 흘렸다.

함께 찾은 최대길(81) 어르신도 당시의 억울함을 생생하게 전했다.

그는 "1942년 아버지가 일본 탄광에 끌려가 돌아가셨는데, 당시 피해자에 대한 보상 대부분이 SOC 사업에 투자됐다"며 "지금이라도 정부가 더욱 정확한 보상 등 피해자에 대한 위로와 관심이 절실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홍 회장은 "그동안 뜻 있는 일본인 몇 분들이 도와줘서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군인군속 희생자 보상 등의 소송과 야스쿠니신사 합사 거부 소송 등을 했지만, 단지 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모두 기각되는 억울함을 겪었다"며 "그러나 더 힘든 것은 무관심 속에, 우리 역사 속에 묻히는 두려움이 더 힘들다"고 말했다.

그는 "일제 강점기 시절 억울함을 풀지 못하고 돌아간 피해자들 한이 여전하다"며 "한때 국적을 포기하는 시위를 하는 등 관심을 요구했지만, 정작 우리 정부가 과거를 돌아보지 않고 기억하려 하지 않으려 하는 것 같다"고 섭섭함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이어 "일제에 강제로 끌려간 우리가 왜 이 시대까지 외면받아야 하는지 정부가 답해야 한다"며 "대한민국 국민으로, 유공자로 명예회복을 해주어야 한다"고 재차 목소리를 높였다.

ha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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