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 불태워 그려낸 심연…윤형근 '천지문'을 만나다

입력 2018-08-02 16:12
슬픔 불태워 그려낸 심연…윤형근 '천지문'을 만나다

곡절 많은 삶에서 묵묵히 화업…오묘한 검정 세계 구현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에 5·18 광주 작업 '다색' 등 최초 공개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베레모를 쓴 한 남자가 섰다. 왼손은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오른손은 주먹을 불끈 쥔 모습과 베레모 아래 눈빛이 결연해 보인다.

1974년 10월 어느 날, 40대 중반 화가는 카메라 앞에 섰다. 왼쪽 뒤에는 우리 근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스승이자 장인이었던 김환기 전면점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를, 오른쪽에는 이제 막 시작한 자신의 작업 '천지문'(天地門)을 걸어둔 채.

윤형근(1928∼2007)이 신촌 작업실에서 스스로 촬영한 이 흑백사진은 그의 삶과 예술을 일러준다. 1973년 숙명여고 미술 교사이던 작가는 중앙정보부장이 얽힌 부정입학 비리를 따지고 들었다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끌려갔다. '레닌 모자'인 베레모를 썼다는 이유였다. 밥벌이를 잃고 요시찰 인물로 손가락질받던 작가는 얼마 후 김환기의 갑작스러운 타계 소식과 마주해야 했다.

극단적인 분노와 상실을 경험한 작가는 해사한 색을 내려놓았다. 대신 큰 붓을 든 채 "어둡고 살거운" 세계를 파고들었다. 흑백사진에는 큰 산이던 김환기와 결별하고 새롭게 출발하는 순간이 담겼다. 탄압 구실이 된 모자를 여전히 쓴 모습에서는 그의 성품을 읽어낼 수 있다.



4일 국립현대미술관(MMCA) 서울에서 개막하는 '윤형근' 전은 작가 스스로 '천지문'으로 명명한 작업을 중심으로 평생 화업을 돌아보는 자리다. 작품 40여 점과 드로잉 40여 점, 아카이브 100여 점이 나왔다.

2일 언론에 먼저 공개된 전시장에는 하늘을 뜻하는 청색과 땅을 뜻하는 암갈색을 섞어 탄생시킨 오묘한 검정을 큰 붓으로 찍어 내린 작품들이 내걸렸다.

칠하고 말리고 다시 칠하고를 반복한 끝에 아득한 깊이감을 만들어낸 검정 기둥들 앞에서는 자연히 숙연한 마음이 든다. 젯소를 칠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캔버스에 물감이 배어든 흔적은 먹의 번짐 혹은 불의 그을림을 떠올리게 한다.

별도 공간에 마련된 '다색' 연작은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소식을 전해 듣고서는 마당으로 달려나가 그린 작품이다. 캔버스 속 쓰러진 검은 기둥들에는 작가의 울분이 담겼다. 현대미술관은 유족이 소장하던 작품을 지난해 사들여 이번 전시를 통해 일반에 처음 공개했다.

김인혜 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기자간담회에서 "윤형근은 작업뿐 아니라 삶에 대한 태도나 사상에서도 정말 큰 작가"라면서 "4·19 세대인 작가는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을 목격하며 느낀 비애감과 비참함을 '다색'에 담았다"고 설명했다.

미술관은 작가의 신촌 작업실을 별도 공간에 재현했다. 작가가 소장했던 김환기, 최종태, 도널드 저드 등의 작품과 고가구, 토기, 도자기 등 수집품을 그대로 살펴볼 수 있다. 김환기가 작고 15일 전 윤형근에게 남긴 엽서 등도 전시돼 흥미롭다.

전시는 12월 16일까지. 문의 ☎ 02-3701-9500.



air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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