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유석 판사 "'미스 함무라비' 현실성, 양날의 검이었죠"

입력 2018-07-15 07:50
문유석 판사 "'미스 함무라비' 현실성, 양날의 검이었죠"

"젠더 감수성은 결국 역지사지…'성찰하는 꼰대' 되려 노력"

"법정극 증가, 법조계 대한 분노와 연관…뼈아프게 반성해야"



(서울=연합뉴스) 이정현 기자 = 워낙 '글 쓰는 판사'로 유명하지만 자신이 쓴 글이 영상으로 만들어진 것은 그로서도 첫 경험이었다.

법정극의 새로운 지평을 연 것으로 평가받는 JTBC 월화극 '미스 함무라비'의 작가, 문유석 판사를 최근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만났다.

자신이 쓴 글이 드라마화된 것을 볼 때마다 두근거렸다는 그는 "제 상상보다 훨씬 잘 나온 경우도 많았다. 대사도 배우가 어떤 톤으로 연기하느냐에 따라 깜짝 놀랄 정도로 달라지더라"고 말했다.



"유단자인 법원 경위조차 자신을 위협하는 남성 무리에 무력하게 도망쳤던 3부 엔딩이 화제가 됐었는데요. 글을 쓰면서도 그런 감정을 담긴 했지만, 배우의 분노하는 표정 연기가 더해지니 훨씬 좋더라고요. 그게 연기와 연출의 힘이죠."

문 판사는 3부를 비롯해 직장 내 성희롱 등 여러 에피소드에서 남다른 젠더 감수성을 보여줬다.

그는 "'젠더법연구회'라고 여성 법관 대부분이 가입한 법원 내 연구모임에 가입해있다"며 "취지가 멋있어서 가입했는데 처음에는 제가 청일점이었지만 최근에는 남성도 한 10명 된다"고 설명했다.

"2009년에 가입해 여성 법관들의 이야기를 쭉 들었어요. 여성 판사들이라면 아무 어려움 없이 살았을 것 같지만 집안에서도, 사회에서도 무심하게 던져지는 성차별에 고통받더라고요. 저 역시 똑같은 '한남'(한국남자)이지만, 제게 울분을 토하던 많은 여성 법관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공감을 안 할 수가 없어요. 재판에서도 많이 보게 되죠. 물리적인 힘 차이 때문에 일어나는 폭력들요. 젠더 감수성은 결국 역지사지, 인지상정이라 생각합니다. 참, 여성 법관들이 박차오름(고아라 분)을 많이 좋아해 주세요. 자기 일처럼 느끼나 봐요."



불의와 불평등을 참지 못하는 박차오름은 모난 돌처럼 여기저기서 정을 맞기 일쑤다. 어느 조직에나 있는 '꼰대'와 맞닥뜨릴 때는 더욱 그렇다.

문 판사는 자신만의 꼰대가 되지 않는 법이 있느냐고 묻자 "내가 어떻게 꼰대가 아니라고 단언하겠느냐"며 "나이, 남자, 부장판사, 이 삼위일체가 되면 꼰대를 피하기 어렵다. 다만 양질의 꼰대, 성찰하는 꼰대가 되려고 노력한다"고 웃었다.

'꼰대 퇴치법'에 대해서는 "박차오름 같이 무조건 들이대는 걸 권할 수는 없다"면서 "한 명이 말하면 또라이가 되고, 10명이 말하면 대세가 된다. 우군을 만들어 흥분하지 말고, 포기하지 않고 즐겁게 세상을 바꾸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문 판사는 캐릭터들에 대한 애정 표현도 아끼지 않았다.

"임바른(김명수)은 제 어린 시절이 많이 투영됐어요. 저도 그 무렵엔 극히 개인주의적이고 시니컬했거든요.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는 정보왕(류덕환)에 가까워졌어요. 그처럼 노는 것, 들쑤시는 것 좋아해요. (웃음) 물론 되지도 않게 들이대던 박차오름 같은 면도 있었죠. 나이 먹으니 한세상(성동일)이나 수석부장(안내상)도 닮아가고요. 성공충(차순배) 빼고는 모든 캐릭터에 제 모습이 들어있네요."



그러고 보니 극 중 법원의 숙원사업인 상고법원 설립을 위해 밤낮없이 뛰어다니던 성공충은 최근 불거진 양승태 사법부의 재판거래 의혹을 떠올리게 했다.

문 판사는 "의도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을 아끼면서도 "성공충처럼 우직하고 인정욕구를 가진 사람이 성찰하지 않고 '노오력'만 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준 것 같다. 어느 조직에나 있을 법한, 산업화 이데올로기의 상징"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주연 배우들에게 고마운 마음도 전했다.

"고아라 씨에게는 그저 미안해요. 여배우면 예쁘게도 좀 나와야 하는데 너무 힘든 일만 겪게 했잖아요. 다음에는 좀 행복한 역할을 하길 바라요. 임바른과의 러브라인도 진도가 영 안 나갔고…. 그래도 미완(未完)이 오래 기억되잖아요. (웃음) 김명수 씨는 노력하는 모습이 정말 많이 보였던 배우예요. 극을 통해 성장해줘서 고마워요. 외모는 비현실적이었지만. (웃음) 성동일 씨는 제가 많이 배웠어요. 대본보다도 그 나잇대의 고뇌를 100배는 더 잘 표현해줬죠. 감사합니다."



'미스 함무라비'는 리얼리티를 잘 살렸다는 호평 속에 쾌조의 스타트를 했으나 북미회담, 월드컵 등 국가 대사들과 겹치면서 중간에 다소 힘이 빠진 면이 있다.

이에 대해 문 판사는 자신의 부족함으로 책임을 돌렸다.

"이번 작품은 전체가 10이라면 재미 5, 의미 5 정도였던 것 같아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 마음이 앞섰죠. 그런데 드라마는 가르치거나 질타하기보다는 편안하고 친절하게 재밌어야 하는 것 같아요. 재미 9, 의미 1 정도로 해서 의미는 자연스럽게 드러나도록요. 통속성은 곧 친근함이죠. '미스 함무라비'를 보며 너무 현실적이어서 불편했던 분들도 있었을 거예요. 다음에는 '병맛 로코' 같은 작품도 해보고 싶네요. (웃음)"

그는 최근 장기 내홍을 겪는 법조계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최근 법정극이 많아진 것은 시민사회가 법조계에 갖는 분노, 불만과 무관치 않은 것 같아요. 저를 포함한 법조계는 디테일을 따질 게 아니라 그 메시지에 무릎 꿇고 경청하며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뼈아프게 반성하고 달라져서, 지금처럼 분노하고 불평하는 법정극이 줄어드는 시기가 왔으면 합니다."

lis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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