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개털'의 못다 한 사랑…시인 김륭 시집

입력 2018-05-07 09:00
'진정한 개털'의 못다 한 사랑…시인 김륭 시집

'원숭이의 원숭이' 출간, 평론가들 '독신자의 사랑' 해석

(창원=연합뉴스) 정학구 기자 = '사랑보다 오래 살아야 한다'

시집 뚜껑을 여는 순간, 뭔가에 뒤통수를 한 방 맞은 듯 얼얼해졌다.

목차에 들어가기 전 시인은 '사는 것만으로 부족한 사람이 있다고 쓴다/ … /몸 바깥을 나가 볼 일이 생겨난다/ 그냥 마음 좀 아파라/당신도 그래라'며 권두언을 짧게 끊었다.

육신을 가진 당신이 사랑보다 오래 살면?

거꾸로 사랑이 먼저 죽고, 사랑을 먼저 보내고 당신이 살아남으면?

시인은, 사람은 가고 사랑이 남은 공간을 '검은 어항'이라고 이름 지었다.

모두 잠든 밤 혼자 등을 켜고 앉으면 시간이 갈수록 모래성처럼 사위어가는 어둠(어항)에 갇힌 몸.

그 속에 그냥 사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뭔가 다른 몫까지 해야 할 강박장애를 앓는 '내'가 있다.

시집 곳곳엔 삶과 죽음, 육신과 영혼을 넘나드는 당신이 있다. 당신은 신(神)이 되기도 한다.





경남에 터 잡고 사는 중견 시인 김륭이 시집 '원숭이의 원숭이'(문학수첩)를 냈다.

시어나 문장이 범상치 않고 쉽게 다가가질 못할 듯하면서도 곱씹을수록 진한 의미로 다가온다.

평론가 조강석은 시 전체를 관통하는 뭔가를 '독신자(瀆神者)의 사랑'으로 이름 붙였다.

시 곳곳에 신이 등장하고 부조리한 현실을 만들어낸 신에 저항하고 싸우기도 한다.

'함께 살지 않고도 살을 섞을 수 있게 된다/ … /프라이드 반 양념 반의 그녀와 나는 서로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 죽었으면서도/ 살아 있는 척 손을 잡고,/ 죽음을 꺼내 볼 수 있게 된다/화분에 불을 주듯 그렇게 서로의 그림자로 피를 닦아 주며 울 수 있게 된다/ 신과 싸우던 단 한 명의 인간이/ 두 명으로 늘어나게 된다.' ('녹턴')



그런데 시를 읽다 보면 어쩜 '독신자(獨身者)의 사랑' 이야기로 들리기도 한다. 독자의 몫이다.

시인에게 당신은 죽었지만 사랑은 죽지 않았고, 사람은 없지만 사랑은 영육의 경계를 넘나든다.

'…나는 죽었군 나는 우산을 그녀에게 건네주고 돌아와 버린다 그제야 내 사랑, 그녀가 나를 사람이 아니라 사랑이라 부른다 좋다, 좋다/죽었더니 좋더군/ … /언젠가 한번은 원숭이와 바나나는 결혼할 테지만/나는 죽었군 이름도 없이 좋다, 좋다/참 좋다'('청혼-이름 없는 이름')

'… / 참 오래도 죽는구나, 당신아/ 당신, 당신이란 내 하나뿐인/신의 이름으로/ 죽지도 않고 썩었구나, 마음아' ('와이퍼')

사람은 사랑으로 불리니 좋아졌다. 죽음은 순간의 현상이 아니라 진행형이고 내 맘 속엔 아직 이르지 못한, 도달하고 싶지 않은 종점이다.

육신은 썩음으로 죽음을 맞았지만, 당신은 사랑이란 이름으로 내 속에서 꿈틀거린다.

시인의 시는 곳곳에서 마침표를 찍지 못하고 쉼표로 끝맺음했다. 잘못 표시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의도함으로 읽는다.

아직 시는 끝나지 않았고 내 사랑에도 아직 마침표를 찍을 수 없다는 외침이자 함정으로.

때로 시인은 육신에 가차 없이 칼을 들이대기도 하고 해체하기도 하고 분노를 내지르기도 한다.

'왼쪽 뺨에 오른쪽 뺨은 손님/ 가끔 뺨은 산산조각이 난다, 여기까지가/ 내가 몸으로 때운 연애/ 모르스 솔라(Mors sola) 모르스 솔라 ('가만히 두 뺨-비와 손님2')

모르스 솔라는 라틴어로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죽을 때까지 한 몸이란 의미다.

'혼자서 되는 일이 아니다/ 내 몸을 내가 나르는 일마저, 끝내/ 나는 당신을 잊지 못할 것이다. 언젠가 한번은/물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왜 머리가 없는 걸까 도대체 왜/ 내 삶은 엉덩이뿐일까/ …('잠(潛)')

'개털이 되자, 진정한 개털이 되자, 그것은/어느 방탕한 탁발승이 제 머리를 깎다가 깜빡 목을 베는 일./ … / 그러니까 사람 노릇 못하는 놈은/ 개 노릇도 못하는 법!/ … ('개털')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김륭은 2007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시,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동시가 당선돼 등단했다.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성정을 보이기도 하는 그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과서에 동시가 실릴 정도로 동시인으로서 더 이름을 알렸다.

'뭐든 제멋대로 되지 않으면/ 온몸을 바동바동/ 울지 마 울지 마/ 달래면 달랠수록 더 큰/ 울음을 내뿜는/ 내 동생/ 아기고래다!/ 대왕오징어였으면/ 큰일 날 뻔했다/ 식구들 모두 시커멓게/ 먹물을 뒤집어썼을 테니까/ 앞이 깜깜했을 테니까/ (초등 3학년 1학기 국어교과서 수록 '아기고래' 전문: 동시집 '삐뽀삐뽀 눈물이 달려온다'(문학동네 간))

그는 시집 '살구나무에 살구 비누 열리고', 동시집 '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 '삐뽀삐뽀 눈물이 달려온다', '별에 다녀오겠습니다', '엄마의 법칙', 이야기 동시집 '달에서 온 아이 엄동수' 등을 펴냈다.

제2회 문학동네 동시문학상 대상, 제9회 지리산문학상을 받았다.

b940512@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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