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범 돼 죽어간 동료들 원한 푸는 것이 제 책무"

입력 2018-01-02 11:54
수정 2018-01-02 14:32
"전범 돼 죽어간 동료들 원한 푸는 것이 제 책무"

이학래 회고록 '전범이 된 조선청년', 민족문제연구소서 발간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식민지 조선에서 일제의 포로 감시원으로 동원됐다가 전후 이른바 'B·C급 전범'으로 전락했던 이학래(92) 씨의 회고록이 국내에서 출간됐다.

신간 '전범이 된 조선청년'(민족문제연구소 펴냄)은 1925년 전라남도 보성에서 태어난 조선인 청년이 어떻게 이국땅에서 일본군의 말단 포로감시원이 됐고, '전범'의 멍에를 지게 됐는지를 구술한다.

17살 청년의 인생은 3천 명의 포로 감시원을 2년 계약으로 모집한다는 일제 광고를 접하면서 일순간에 뒤바뀐다.

면사무소에서도 그에게 시험을 볼 것을 권했는데, 당시 관공서의 이야기를 거절하기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사실은 강제징용"이었다는 게 이씨 주장이다.

2개월간 군사 훈련을 받은 뒤 도착한 곳은 태국·미얀마 철도 건설 현장이었다.

포로 감시와 작업 인원 모집 등을 맡은 이씨는 허기져 몰려든 포로들에게 화를 내거나 규칙을 위반한 이들의 뺨을 때리는 등 별다른 인식 없이 비인간적인 대우를 했음을 숨기지 않는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로 인정머리 없는 짓을 했다고 후회하고는 하지만, 당시의 일본군은 포로를 인간으로 취급한 적이 없었어요. 일본군에게 포로는 무시해도 좋은 존재였어요."

일제 패망 직후 이씨와 동료들은 자기 변론도 허용되지 않는 전범 재판을 받으며 변호사의 민족적 편견 등으로 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책 후반부는 사형수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이씨가 반세기 넘는 세월 동안 일본 정부를 상대로 평생을 싸우고, 또 스스로 반성했던 과정을 펼쳐 보인다.

세상 물정에 어두웠던 젊은이는 공부 모임 '평화그룹' 참여, 중앙노동학원 입학 등을 하면서 왜 식민 피해자인 자신이 전범이 되었는지를 공부해 나간다.

이씨와 조선인 전범 동료는 1955년 4월 '동진회'를 결성하고 일본 정부에 지속해서 국가 보상과 유골 반환을 요구했다.

1960년대 초 실현될 듯하던 국가 보상은 1964년 한일협정 타결로 없던 일이 됐다.

일본 정부는 보상은 한국 정부의 몫이라며 책임을 외면했고, 대일 민간 청구권이 1945년 8월 15일 이전으로 한정되면서 조선인 전범의 사형 같은 경우는 포함되지 않았다.

이씨는 "양국 정치의 사각지대, 전전·전후의 사각지대에 우리 문제는 함몰되고 말았다. 한일 어느 나라 정부와 교섭해도 해결되지 않았다"고 당시 답답했던 마음을 토로했다.

이후에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입법화 운동 등을 펼쳐 온 이씨는 1997년부터 전 연합국 포로와 가족들을 초대해 사죄하면서도 조선인 전범들은 못 본 척하는 일본 정부의 이중적인 면모를 강도 높게 비판한다.

"포로에 대해서 정중한 사과를 하는 한편, 포로 관리를 시키고 책임을 떠안긴 우리는 왜 방치 상태로 내버려 두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일본에 의해 잠시 쓰이고 버려졌습니다. 우리 문제는 한국과 일본 정부간 교섭대상에서도 제외됐습니다. 실로 허무하고 비통한 심경을 떨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씨는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전범이 돼 일본의 책임을 떠안고 죽어간 동료의 원한을 다소나마 풀어주는 것이 살아남은 자신의 책무라는 것이다.

'동진회'가 수십 년의 활동을 이어오는 동안 생활고와 우울증, 친일파라는 손가락질 등으로 조선인 전범 자신이나 그 가족이 비극적 선택을 한 사례들은 독자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이 씨는 한국판 발간 후기에서 "반강제적이었다고 해도 동시대에 독립 투쟁을 한 분들도 있었기에 부채감은 쉽사리 떨칠 수 없었다"라면서 "한국 정부가 2006년 일본 강점기하 강제동원 피해자로 인정해 명예 회복해준 점에 감사한다"고 밝혔다.

312쪽. 1만5천 원.



air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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