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시민들 끌려가 사라졌다'는 옛 광주교도소 어떤 곳
3공수여단 주둔 "농장터, 동·서쪽 담장 주변 시신 가매장" 진술 잇따라
(광주=연합뉴스) 장아름 기자 = 5·18 민주화운동 당시 행방불명된 시민들이 암매장됐다는 증언이 잇따른 옛 광주교도소에 대한 발굴작업이 시작됐다.
2015년 10월 교도소가 이전하면서 지금은 사실상 빈 건물만 남은 이곳에서 37년 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광주교도소는 상무대 영창에 갇혔던 시민 4천여 명 중 400여 명이 투옥됐던 곳으로, 광주시는 이곳을 5·18사적지 22호로 지정했다.
특히 1980년 5·18 직후 계엄군에 의해 암매장된 시민들의 시신이 발굴됐던 곳 중 한 곳이라 재소자와 이곳에 있던 군인들의 증언이 더 큰 신빙성을 얻고 있다.
광주 북구 문흥동 88-1번지.
전남대학교에 배치됐던 3공수여단은 1980년 5월 21일 오후 4시께 병력을 퇴각해 호남고속도로와 광주-담양 도로로 나가는 광주의 북쪽 관문에 자리 잡은 광주교도소로 주둔지를 옮겼다.
군 기록에 따르면 당시 트럭 2대로 전남대에 억류한 시민들을 함께 끌고 갔다.
생존자들과 3공수 소속 김모 소령은 1995년 검찰조사에서 "군이 트럭에 최루탄에 사용되는 CS분말가스를 터뜨려 질식하고 2∼3명이 밟혀서 사망했다. 차에 사람들을 욱여넣고 밀려나오면 대검으로 찔렀다"고 진술했다.
보안대 자료에는 옛 교도소에서 억류당한 시민 28명이 숨졌다고 돼 있으나 5·18· 직후 임시매장된 형태로 발견된 시신은 교도소 관사 뒤 8구, 교도소 앞 야산 3구 등 11구뿐이었다.
당시 교도소 주변에서 광주 소식을 외곽으로 알리려던 시민군과 계엄군 사이에서 총격전이 벌어졌고 계엄군의 발포로 아이를 태우고 광주를 떠나려던 비무장 시민과 마을 주민들이 죽거나 다쳤다.
군은 시민을 사살하면서 '폭도들이 교도소를 습격하려 했다'는 거짓 정황을 꾸며내기도 했다.
3공수 장교들과 당시 재소자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교도소 재소자 농장터, 동·서쪽 담장 주변 등 총 5곳에 시신이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김 소령은 검찰 조사에서 '담장에서 3m 정도 떨어진 곳에서 부하 5∼6명을 데리고 시신 12구를 매장했다'고 밝혔고 북측 담장 밖에서 굴착기가 작업하는 모습을 멀리서 봤다는 재소자 증언도 확인됐다.
또 최근에는 3공수 부사관 출신 김모씨가 5·18 기념재단에 "조준 사격으로 전복된 차량의 시신을 수습하고 하루 정도 방치했다가 부패해 5∼7구를 (서쪽 담장 주변에) 임시매장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발굴 대상 지역들은 모두 교도소 담장 밖 외곽이지만 민간인 출입을 막는 울타리 안쪽 보안구역에 속해 있다.
현재는 바닥 일부가 아스팔트로 시공됐고 교도관 숙소와 테니스 장 등이 들어서는 등 당시와 주변 지형·지물이 달라져 5·18 기념재단은 복수의 증언이 겹치는 곳들을 발굴 대상지로 정했다.
5·18 당시 보안대 자료에 따르면 옛 교도소에서 억류당한 시민 28명이 숨졌는데 항쟁 후 임시매장된 형태로 발굴된 시신은 11구에 불과하다.
5·18 기념재단은 남은 17명이 옛 교도소 일원에서 암매장당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옛 교도소 일원에서 유해가 나오고, 유전자정보 분석 과정에서 5·18 행불자로 밝혀지면 37년 만에 암매장지 발굴이 성공하게 된다.
현재 법적으로 5·18 행불자 지위가 인정된 사람은 82명으로, 6명의 유해는 그동안 망월동 5·18 구묘역에 무연고 묘지에 안장됐던 것으로 밝혀졌고 76명의 흔적은 아직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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