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작가 김석범 "이승만 정부 정통성과 4·3사건 뗄 수 없어"

입력 2017-09-17 17:15
재일작가 김석범 "이승만 정부 정통성과 4·3사건 뗄 수 없어"

"정권 안 바뀌었으면 입국 곤란했을 것"…이호철통일로문학상 수상



(서울=연합뉴스) 김계연 기자 = "이승만 정부가 임정의 법통을 계승했습니까? 3·1운동을 탄압하는 일제와 더불어 행동한 친일파, 해방 후에는 친미파로 변신한 민족 반역자들이 토대가 되어서 세워진 정부입니다."

재일동포 작가 김석범(92)은 17일 오후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 정부의 정통성을 가로챘다"며 이렇게 말했다. 민간인출입통제선 너머 경기 파주시 캠프 그리브스에서 열린 제1회 이호철 통일로 문학상 시상식 자리에서다.

김석범은 2015년 제주 4·3평화상 수상 소감에서 이승만 정권의 정통성을 문제 삼으며 같은 취지의 발언을 했다가 같은해 한국 정부에 의해 입국이 불허된 바 있다. 작가는 남·북한과 일본 어느 쪽의 국적도 거부하는 조선적(朝鮮籍)인 탓에 방한할 때마다 여행증명서를 받아야 한다. 일부 언론과 보수단체가 작가의 '역사관'을 문제 삼았고 행정자치부 요청으로 제주도가 4·3평화상에 대해 감사를 벌이는 소동도 벌어졌다.

김석범은 그러나 이날도 이승만 정부를 향한 강도 높은 비판을 이어갔다. 작가는 4·3사건을 "제2차 세계대전 후 최초의 제노사이드"라고 부르면서 "정통성 없는 이승만 정부가 국제적으로 정통성을 과시하기 위해 제주도를 어린아이까지 다 포함한 빨갱이의 섬, 소련의 주구라는 구실을 붙여 철저한 멸공통일의 단독정부를 세우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고 만행을 벌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4·3의 역사 자리매김은 동시에 8·15 이후 한국 해방공간의 역사 바로 세우기, 역사 재검토, 재심과 불가분의 과업으로 생각합니다. 해방공간 안에서 학살을 동반한 폭력행사로 세워진 이승만 정부의 정통성을 꾸며내는 데 온갖 술책이 동원되었으며, 그중 대학살을 당하고 이승만 정부 수립의 희생양으로 바쳐진 것이 제주도입니다. 이승만 정권의 정통성과 4·3 대학살은 불가분의 관계이며, 이것을 똑똑히 밝혀야 하겠습니다."

작가는 "저승보다 천당보다 더 멀리 떠 있는 딴 별에서 이승만이 뉘우친다 하더라도 본인이 뿌리가 되어 저지른 죄과는 씻어버리지 못할 것"이라며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모신 친일파들이 뿌린 화근이 이호철 책 속의 이승만의 말대로 후대의 썩어 빠진 한국사회의 뿌리가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1925년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태어난 김석범은 소설을 통해 4·3의 비극을 알리고 진상을 밝히는 데 애써왔다. 4·3사건을 중심으로 식민지배와 분단 현실을 치열하게 응시해왔기 때문에 분단문학의 거장인 이호철(1932∼2016) 작가를 기리는 이 상을 받을 적임자라고 심사위원회는 설명했다.

1957년 발표한 '까마귀의 죽음'은 4·3사건을 다룬 최초의 소설로 꼽힌다. 1997년에는 원고지 2만2천 매 분량의 역작 '화산도'를 탈고했다. 4·3사건이 발생하기 직전인 1948년 2월 말부터 이듬해 6월 제주 빨치산의 무장봉기가 완전히 진압될 때까지 해방정국의 혼란을 그린 작품이다.

작가는 시상식 이후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올 때마다 마지막 고국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재작년에는 제주에 갔다가 일본에 들어가서 '마지막 한국행'이라는 표제로 에세이를 썼다"며 "이번에 정권이 바뀌지 않았으면 입국하기 곤란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재작년 4·3평화상을 둘러싸고 벌어진 소동에 대해서는 "이승만 정권에 정통성이 없다고 한마디 했을 뿐인데 그것으로 말미암아 (언론과 보수정당이) 떠든 건 지나친 것이었다. 일본 신문에도 다 나와 창피스러웠다"고 했다.

작가는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 한국 공기가 오염됐는데, 시원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서 들어왔다"고 말했다. 촛불정국 이후 들어선 현 정부를 "인민이 데모로 만든 정권"이라고 표현하며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때도 이런 일은 없었다. 남쪽의 내 조국이고, 대단히 기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등단 25년 이내 작가에게 주는 특별상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삶을 소재로 한 '한 명', 이한열 열사의 운동화 복원 과정을 그린 'L의 운동화'를 쓴 작가 김숨(43)이 받았다.

간담회에 동석한 김숨은 "김석범 선생님과 한자리에 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고 작가생활을 하는 데 지혜와 에너지를 주실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4·3사건에 관한 김석범의 말을 인용하며 "소재는 매번 달라지겠지만 타살된 기억, 자살한 기억을 복원하는 작업을 하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김석범은 이날 오후 휴전선 인근 비무장지대를 돌아보고 18일 오후 은평문화예술회관 숲속극장에서 열리는 '역사의 정명과 평화를 향한 김석범 문학' 심포지엄에서 기조강연을 한다.

dad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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