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이렇게 끝내면 안 되는 이유

입력 2017-08-09 15:28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이렇게 끝내면 안 되는 이유

독성학자 정진호 교수 신간 '위대하고 위험한 약 이야기'



(서울=연합뉴스) 이웅 기자 = 다신 일어나선 안 될 가습기 살균제 사건과 유사한 비극이 반세기 전 해외에서도 있었다.

독일 제약회사인 그뤼넨탈은 1954년 탈리도마이드라는 진정제를 개발했는데, 2차 세계대전의 후유증으로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어 판매량이 아스피린에 육박했다. 그 뒤 입덧에 효과가 있다는 연구까지 나오면서 임신부들 사이에서도 널리 쓰였다.

하지만 1961년 약을 먹은 산모가 팔다리가 짧거나 없는 기형아를 출산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판매가 중단됐다. 탈리도마이드는 5년간 46개국에서 판매됐는데 1만2천 명의 기형아를 낳게 했다. 현재까지 생존한 피해자 6천여 명은 만성 통증과 피로에 시달린다고 한다.

독성학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정진호 서울대 교수는 새로 출간한 저서 '위대하고 위험한 약 이야기'(푸른숲 펴냄)에서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탈리도마이드 사건과 대비시키며 지금처럼 사건을 끝내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탈리도마이드 사건은 오늘날 체계적이고 엄격하기로 소문난 미국 의약품 관리 제도의 기틀을 마련하는 계기가 됐다. 무엇보다 판매 허가 전 임상시험이 의무화됐다. 자료심사 기간이 종전의 3배인 180일로 늘어났으며, 기존 의약품 관리도 강화돼 시판된 600여 개 약이 퇴출당했다. 약의 겉포장에 부작용을 표시하고 처방 약 광고를 제한할 수 있게 된 것도 이때부터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미 식품의약청(FDA)의 허가심사는 그리 철저하지 않았다. 1960년 FDA에서 탈리도마이드 심사를 맡았던 프란시스 켈시 박사는, 이미 여러 나라에서 판매 허가를 받은 약이지만 안정성을 직접 확인하고자 제약사에 임상시험 자료를 요구했다. 제약사와 FDA 고위관리들은 대충 넘어가라고 압박했지만, 굴복하지 않고 끝내 미국 시판을 허가하지 않았다.

탈리도마이드의 비극이 알려진 뒤 켈시 박사는 국가적 영웅이 됐다.

미국은 허술한 제도와 관행을 이겨낸 한 양심적인 학자 덕분에 전대미문의 재앙을 피해갈 수 있었지만, 그 교훈은 깊이 새겼다.

정 교수는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21세기에 도저히 일어나서는 안 될 비극"이라고 지적한다. 우리나라의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1994년 인체에 치명적인 살균제가 처음 판매된 후부터 올 2월 피해 구제를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기까지 무려 20여 년의 시간이 걸렸다. 현재 공식 확인된 사망자만 239명, 신고된 피해자만 5천600여 명에 이른다.

지난해 가습기 살균제 국회 국정조사특별위원회에 전문위원으로 참여한 정 교수는, 이 사건이 왜 그리 오랜 세월 방치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3단계(사전예방-문제해결-사후조치)로 나눠 분석한다.



우선 시판 허가 과정에서 인체 유해성 검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점, 그리고 2006년부터 의문의 폐 질환 사망 환자가 보고됐으나 그 뒤 5년이 지나도록 원인을 파악하지 못한 점을 지적했다. 마지막으로 2011년 폐 질환과 가습기 살균제의 관련성이 드러났음에도 정부가 서둘러 해결책을 찾기보다 사건을 덮기에 급급했던 것이 사건 해결을 지연시켰다고 분석했다.

정 교수는 직접적인 가해자는 SK케미칼, 옥시레킷벤키저, 세퓨 등 가습기 살균제를 만들어 판 기업이지만, 정부와 전문가 집단, 언론에도 책임이 있다고 했다. 그는 "정부 부처 간의 칸막이 행정과 무사안일주의, 이윤만을 추구하는 가해 기업의 행태, 문제를 해결할 만한 사회 경험과 과학 기반이 없는 전문가들의 민낯 등 우리 현실을 마주하는 내내 몹시 부끄러웠다"고 토로한다.

책은 탈리도마이드와 가습기 살균제 사건 외에도 인류사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던 약과 의학에 관한 많은 흥미진진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약이 독으로 변질되고 때론 독이 약으로도 쓰이는 '약과 독의 양면성'에 대한 통찰도 준다. 탈리도마이드는 훗날 한센병과 혈액암 치료제로 부활해 국내에서도 쓰이고 있다. 272쪽. 1만6천원.

abullapi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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