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봉암 선생 유족 "죽산은 '독립운동가'…유공자 인정해야"

입력 2017-07-30 08:31
조봉암 선생 유족 "죽산은 '독립운동가'…유공자 인정해야"

죽산 58주기 인터뷰…"간첩 누명 벗었지만 서훈 못 받아"

"보훈처의 '친일 근거'는 일제 총독부 기관지"

(서울=연합뉴스) 이효석 기자 = "아버지는 독립운동가입니다. 후세가 아버지를 있는 사실 그대로 기억했으면 합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사실 그대로…"

죽산 조봉암 선생(1899∼1959)의 58주기를 하루 앞둔 30일 죽산의 장녀 조호정(89) 여사는 서울 종로구 부암동 자택에서 연합뉴스 기자와 만나 "아버지는 옳은 일만 하신 분"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역사학계는 죽산을 '사회주의 노선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로 평가한다. 국가기록원은 죽산이 1919년 '조선독립 운동가를 검거하지 말라'며 시위를 벌이다가 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경성지방법원 판결을 보관하고 있다.

2011년 그의 간첩 혐의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해 사망 52년 만에 누명을 벗긴 대법원도 "피고인(죽산)은 일제강점기하에서 독립운동가로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투쟁하였고…"라고 판결문에 명시했다.

그러나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목록에서 '조봉암'을 검색하면 어떤 기록도 나오지 않는다. 보훈처가 '친일 흔적'이 있다며 독립유공자 서훈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천 서경정에 사는 조봉암씨가 해군부대의 혁혁한 전과에 감격해 휼병금(장병 위로금)으로 150원을 냈다'는 기사가 1941년 12월 23일자 '매일신보'에 있다는 거예요. 그러나 죽산은 당시 그럴 돈도 없었고, 관헌 자료에 따르면 서경정(지금의 인천 중구 내동)에 산 적도 없습니다."

죽산의 손녀사위인 유수현(64)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이사의 말이다. 유 이사는 "매일신보는 1940년 당시 유일하게 폐간되지 않은 일간지였지만 동시에 총독부 기관지였다"면서 "해방 직후 매일신보는 식민지 시절 '총독 정치 선전기관의 졸병'이었다며 사죄했다"고 지적했다.

유족은 2011년 죽산이 간첩 누명을 벗은 직후 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을 냈다. 그러나 보훈처는 이 기사를 이유로 반려했다. 보훈처는 2015년 재심 신청 때도 같은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 이사는 "'친일 증거가 없다'는 증거를 찾아야 한다니 답답한 노릇"이라면서 "억울하게 간첩 누명을 쓰고도 '내 죽음이 민주 발전에 도움이 됐으면 한다'며 사형을 받아들일 정도로 신념이 강한 사람이 친일을 했겠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2011년 죽산이 무죄 판결을 받은 날, 대법원에 있었던 조호정 여사는 "이제 아버지 비석에 비문을 새길 수 있게 됐다"며 기뻐했다.

그러나 중랑구 망우리공원에 있는 죽산 묘지의 비석 뒷면은 아직 비어있다. '누명'을 완전히 벗지 못했다는 상징이라고 유족은 말한다.

죽산의 손녀이자 조 여사의 딸인 이성란(57)씨는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할아버지 서훈이 결정되면 좋겠다"며 말끝을 흐렸다. 우리 나이로 아흔이 된 조 여사는 건강이 좋지 않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31일 오전 죽산 묘지에서 열리는 추도식에 참석하지 못한다. 그는 인터뷰 내내 '후, 후' 하고 숨을 가쁘게 내뱉었다.



1899년 강화도에서 태어난 죽산은 사회주의 노선 독립운동을 이끌었고, 해방 후 국회부의장을 역임했다. 초대 농림장관으로서 농지개혁에 성공했고, 제 2·3대 대선에서 자유당 이승만 후보에 대항했다.

하지만 1958년 '진보당 사건'에 연루돼 간첩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1959년 7월 형장에서 생을 마쳤다. 유족이 재심을 청구한 끝에 2011년 1월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의 죽음은 헌정사상 첫 '사법 살인'으로 기록됐다.

hy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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