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형은 좌우합작 추구한 평화통일 운동의 선구자"
강만길 명예교수, 몽양 여운형 70주기 추모 강연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불행한 분단시대의 역사 위에서 평화통일 운동이 추진된 시발점을 찾는다면 1946년에 일어난 여운형, 김규식 중심의 좌우합작 운동을 들 수 있습니다. 여운형은 적극적인 평화통일 운동가였습니다."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는 독립운동가 몽양(夢陽) 여운형 선생의 70주기를 맞아 18일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몽양은 해방 공간에서 가장 앞선 중도 정치인이었다"고 평가하며 이같이 말했다.
여운형(1886∼1947)은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1914년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후 난징(南京)과 상하이(上海)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했고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에도 기여했다.
그는 1929년 상하이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돼 3년간 옥살이를 하고 나서도 독립운동을 이어갔고, 1944년 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건국동맹을 조직했다.
강 명예교수는 "몽양은 참 특이한 인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해방에 대비한 사람이었다"며 "독립군이 게릴라 활동을 하다가 해방되면 우리나라의 국제적 지위가 높아진다고 생각해 건국동맹을 만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여운형이 계획한 게릴라 활동은 실현되지 않았다. 1945년 8월 15일 갑작스럽게 해방이 됐지만, 미국과 소련의 분할 점령과 좌우 세력의 극심한 대립으로 인해 통일 국가가 수립되지 않았다.
강 명예교수는 몽양을 공산주의자로 보는 시각을 부정하면서 "몽양은 해방 후 정치 지형에서 '온건 좌파'로 분류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여운형은 미군정이 실시되기 전에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해 이승만을 주석으로 내세웠다"며 "독립운동과 통일 국가 건설에 성과가 있는 길이라면 그 방법에 대해서는 그다지 구애되지 않는 입장을 취했다"고 덧붙였다.
조선인민공화국을 세우려는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여운형은 온건 우파인 김규식과 손잡고 평화통일 국가를 만들기 위해 좌우합작 운동에 나섰다.
강 명예교수는 "미국과 소련이 분할한 한반도에서 많은 사람은 극좌와 극우 노선이 아닌 온건 노선, 중간 노선을 선호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좌우합작 운동을 지지하는 기반이 전혀 좁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좌우합작 운동은 몽양이 1947년 7월 19일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서 암살되면서 급격히 힘을 잃었다.
강 명예교수는 "역사 교과서에서 여운형과 김규식에 대한 기술을 더 늘려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몽양은 평화통일론이 정착돼 가는 시점에서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인물일 것"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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