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심 재판만 285일 '송사하면 패가망신'…법원 개선책 마련
'재판 지연·중구난방 변론' 방지할 '당사자 진술서' 추진
4월부터 서울중앙지법 시범실시…전국 법원으로 확대 예정
(서울=연합뉴스) 임순현 기자 = "저는 억울합니다. 판사님이 좀 조사해 주세요!"
장황하게 늘어놓는 변론, 말꼬리 잡기에 급급한 주장, 쟁점과 상관없는 하소연. 모두 재판 기간을 늘리는 원인이다. 민사재판은 주장하는 쪽이 자기주장을 입증하는 게 원칙이지만 도리어 상대방에 '반박해 보라'는 경우도 많다. 소송이 길어지면 당사자들의 감정이 악화하고 시간 낭비, 비용 증가 등 부작용도 뒤따른다. 오죽하면 '송사는 패가망신의 지름길'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대법원 통계에 따르면 민사 합의부 사건의 경우 1심 결론이 나는데 평균 284.9일이 걸린다. 법원이 권고하는 1심 기간인 180일보다 100일 넘게 재판이 지연되는 것이다.
17일 법조계에 따르면 법원은 민사재판이 늘어지는 부작용을 해결하기 위해 한국형 증거개시(디스커버리·discovery) 제도인 '당사자 진술서' 제도의 도입을 추진하기로 했다.
이는 당사자들이 변론 시작 전에 직접 경험한 각종 사실을 마치 형사재판의 진술서 형태로 작성해 재판부에 내는 제도다.
증거개시 제도는 미국에서 활발히 활용하는 제도로 원고와 피고 양측이 다툴 쟁점과 증거들을 본격 재판을 시작하기 전에 공개하는 것이다. 다만 미국과 달리 우리는 법원이 주도적으로 개입해 진술서를 작성하도록 유도한다는 점이 다르다.
변론 과정에서 '중구난방'식으로 쏟아놓는 내용을 미리 서면으로 작성해 내면 당사자 스스로 쟁점을 정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법원도 사건의 윤곽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당사자의 경험과 주장이 시간 순서에 따라 빠짐없이 작성되기 때문에 재판에 필요한 증거목록도 빨리 확정할 수 있다.
법원은 이 제도를 늦어도 2020년 이전에는 도입한다는 목표하에 올해 4월부터 서울중앙지법 6개 재판부(합의부 3개, 단독부 3개)에서 시범시행에 들어갔다.
일단 의료, 교통, 건설분쟁 등 특히 다툼이 첨예한 재판에서 복잡한 사실관계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됐다는 평가가 나왔다.
시범 재판부 중 한 명인 오상용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는 13일 경기도 광주에서 열린 '2017 전국 민사법관 포럼'에 참석해 두 달간의 시범실시 성과를 발표했다.
오 부장판사는 "진술서를 통해 조기에 분쟁의 경위 및 사실관계를 파악할 수 있었다"며 "특히 의료 사건에서 일람표 형태의 진술서를 통해 쌍방 다툼이 있는 사실과 없는 사실을 빨리 구분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대법원은 일선 판사들의 반응을 살펴 이른 시간 내에 시범 운영을 전국 법원으로 확대할 방침이다. 법원행정처 관계자는 "전국 법원에서 운영해 보면서 일선 판사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한 후 정식 도입 여부를 논의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hyu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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