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도 저기도 타임슬립…"서사 전쟁에서 퇴행하는 것"
드라마, 새로운 소재 발굴 시급
(서울=연합뉴스) 윤고은 기자 = 또 타임슬립이다. 이쯤 되면 드라마계가 자기 반성문을 써야 할 판이다.
작품의 완성도와 성패는 뚜껑을 열어봐야 아는 것이고, 비슷한 소재도 '트렌드'라는 이름으로 양해되기는 한다. 또 실제로 배우와 제작진이 누구냐에 따라 비슷한 소재를 가지고도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온 적도 있다.
그러나 최근 너도나도 시간여행 이야기를 쏟아내는 것은 작가와 기획의 게으름 탓으로 보는 시선이 많다. 성공한 소재에 안정적으로 편승하려는 의도와 작가들의 스토리 빈곤이 빚어낸 결과로 보는 목소리가 크다.
◇ 비슷한 소재 이어져
지난 2일 시작해 이제 중반을 넘어선 KBS 2TV 금토드라마 '최고의 한방'은 죽은 줄 알았던 과거의 인기 가수가 과거 모습 그대로 24년 만에 현재로 건너오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동료들은 모두 주인공이 하루아침에 실종됐고, 지금까지 안 돌아온 걸 봐서는 죽은 것이라 생각하고 24년을 지냈다. 그래서 모두 늙었는데, 주인공만 24년 전 모습 그대로 이들 앞에 나타난 것이다.
다음달 19일 시작하는 SBS TV 수목극 '다시 만난 세계'는 18세 소년이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 뒤 13년 만에 다시 나타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13년의 세월이 흘러 그의 친구들은 모두 31살이 됐는데 주인공 소년만 사라졌을 때의 모습 그대로 다시 나타난 것이다.
콘셉트만 보면 이 두 드라마는 쌍둥이처럼 보인다.
오는 8월 시작하는 tvN 주말극 '명불허전'은 조선시대 의원과 현대의 의사가 4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교류하는 이야기다. 현대의 의사가 조선시대로 가는 콘셉트 역시 이미 2012년 MBC TV '닥터 진'과 SBS TV '신의'에서 다뤄졌다.
◇ 스타에 의존하면 실패…이야기 힘 과시해야
이에 앞서 지난 3~5월에는 OCN 주말극 '터널'이 1980년대와 현재를 오가는 이야기를 펼쳤다. 과거와 현재의 교신 속 형사가 범인을 추적하는 이야기라는 점이 지난해 히트한 tvN '시그널'과 유사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그러나 뚜겅을 열자 '터널'은 '시그널'과 다른 이야기, 다른 매력의 드라마라는 것을 보여줬고, 시청자의 호응 속 OCN 채널 역대 최고 기록인 시청률 6.5%를 기록하며 막을 내렸다. 스토리의 힘을 과시한 것이다.
하지만 '최고의 한방'은 실망감을 안겨주고 있다.
KBS가 세운 제작사 몬스터유니온의 창립작이자, '1박2일'의 스타 PD 출신 유호진과 배우 차태현이 공동 연출을 한다는 점에서 관심을 모았으나 타임슬립 소재를 새롭게 응용하는 데 실패했다. 과장된 코미디 속 배우들의 연기도 서로 융화되지 못하고 있고, 시청률은 2~4%에 머문다.
'다시 만난 세계'는 '최고의 한방'과 출발점이 비슷한 데다, 저 옛날 톰 행크스 주연 영화 '빅'(1988)의 거꾸로 버전을 연상시키는 콘셉트다.
'다시 만난 세계'와 '명불허전'의 경우는 여진구-이연희, 김남길-김아중이라는 스타 캐스팅에 의존한 기획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이야기의 힘을 보여줘야 한다. '명불허전'과 유사한 설정이었던 '닥터 진'과 '신의'는 각각 송승헌-박민영, 이민호-김희선이라는 스타를 캐스팅해놓고도 그 이상을 보여주지 못했다.
KBS TV본부장 출신인 이응진 이화여대 융합콘텐츠학과 교수는 30일 "서사가 부족할 때 등장하는 게 타임슬립"이라며 "타임슬립 스토리가 이어지는 것은 지금 작가들의 스토리가 고갈됐다는 것을 보여주는 전형"이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작가들이 과거를 공부해서 미래 지향적으로 써야 하는데 지금의 타임슬립 붐은 '온고지신'(溫故知新:옛것을 익혀 새것을 앎)을 거꾸로 가는 방향"이라며 "서사 전쟁에서 퇴행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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