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언'에서 '촛불'까지…수백 년 광장문화는 한국의 정치전통"

입력 2017-03-27 08:30
"'상언'에서 '촛불'까지…수백 년 광장문화는 한국의 정치전통"

서울연구원 등 기획 '서울사회학'…"4·19, 韓 광장정치의 신기원"

(서울=연합뉴스) 이태수 기자 = 지난 연말 서울 광화문광장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누적 1천600만 명을 끌어낸 '촛불'로 상징되는 광장정치는 조선 시대로부터 수백 년간 이어진 우리나라의 역사적 전통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김백영 광운대 인제니움학부대학 부교수는 저서 '서울사회학'에 실린 '서울의 광장문화,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에서 27일 이같이 주장했다.

김 교수는 2002년 한·일 월드컵 광장 응원, 2008년 광우병 촛불 시위, 지난해 '최순실 국정농단 파문'에서 불거진 광화문광장 촛불 집회 같은 '광장문화'의 뿌리를 조선 시대 육조거리와 종각 일대에서 찾았다.

국왕이 궁궐을 나와 행차할 때 그 앞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언'(上言)과 왕 근처에서 꽹과리 등을 시끄럽게 울려 상언할 것을 청하는 '격쟁'(擊錚)이 대표적으로, 왕이 백성의 소리를 직접 듣는 민의 수렴장치였다는 것이다.

정조 시대 특히 활성화된 상언은 파자교·철물교·혜정교 앞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종로 거리에서 이뤄졌다.

대한제국기에는 덕수문 대한문 앞에 광장이 조성됐다. 당시 독립협회는 광화문 앞에서 '만민공동회'를 빈번하게 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경성부청(현 서울도서관·옛 서울시청) 앞에 광장이 들어섰지만, 홍보탑이나 광고탑이 들어섰을 뿐 민의 분출의 장은 아니었다.

김 교수는 해방 이후 한국 사회에서 광장이 제대로 그 역할을 한 사례로 서울 도심 세종로∼태평로를 달궜던 4·19 혁명에 주목했다.

김 교수는 "현대 한국사회에서 대중 민주주의의 공간으로서 '광장'이 처음 발견된 것은 4·19에 의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해방 이후 한국사회에서 광장 정치가 본격적으로 나타난 최초의 사례이자, 참여 군중의 규모에서 최대의 사례"라고 강조했다.



이후 5·16 군사 쿠데타에 이르기까지 약 1년간 '데모의 홍수'가 일었고, 이와 맞물려 각종 매체에서 '광장 담론'에 쏟아져 나온 점도 그 궤를 같이한다고 봤다.

특히 4·19 혁명이 주로 서울 도심 세종로∼태평로 일대에서 이뤄진 점을 두고서는 경무대·중앙청 등 국가 기능이 이 근방에 집중돼있었고, 시위의 '주력군'이었던 주요 고등학교와 서울대·고려대 등 주요 대학이 당시 도심 인근에 모여 있었다는 점을 들었다.

김 교수는 "이 같은 이유로 도심에서는 상호 소통과 이동이 용이해 시위대의 규모와 시위의 정치적 효과가 단시간에 급속히 증폭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후 1987년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 30년 가까운 군사 정부 아래에서 광장은 숨을 죽여야 했지만, 1980년대 말 가두시위는 독재 정권의 '영토'에 '파열음'을 내는 '해방구'였다고 평가했다.

김 교수는 "육조거리가 총독부 거리와 중앙청 거리를 거쳐 광화문광장으로 변모한 상전벽해의 변화 과정을 통해 한국 광장문화의 독특함 속에 오래된 '어떤 것'이 흐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정리했다.

이어 "조선 시대 상언·격쟁,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 1919년 3·1 운동, 1960년 4·19 혁명, 1987년 6월 민주화 운동, 2000년대 촛불집회에 이르기까지 대중적 에너지의 격렬한 분출로 일어난 사건들은 한국사회 특유의 강한 정치의식과 적극적인 참여문화의 유구한 역사적 전통을 드러낸다"고 짚었다.

'서울사회학'은 한국사회학회와 서울연구원이 공동으로 기획했으며, 김 교수를 비롯해 서우석 서울시립대 도시사회학과 교수·변미리 서울연구원 글로벌미래연구센터장 등이 엮어낸 책이다.

'강남 문화경제의 사회학 : 문화산업과 뷰티산업의 결합', '욕망의 문화사회사, 한국의 러브호텔', '서울의 인구' 등을 조명한 14장(章)으로 꾸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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