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울 수 있을 때까지 비운다" 오규원 시인 10주기

입력 2017-01-21 09:40
"비울 수 있을 때까지 비운다" 오규원 시인 10주기

후배 시인들 사진전·추모시집…첫 시집 '분명한 사건' 복간



(서울=연합뉴스) 김계연 기자 = "통상적으로 모든 시는 의미를 채운다. 의미는 가득 채울수록 좋다. 날이미지시는 의미를 비운다. 비울 수 있을 때까지 비운다. 그러나 걱정 마라. 언어의 밑바닥은 무의미가 아니라 존재이다. 내가 찾는 의미는 그곳에 있다."

시인 오규원(1941∼2007)은 자신의 시론을 '두두시도 물물전진'(頭頭是道 物物全眞)으로 요약했다. 사물 하나하나가 전부 도이고, 하나하나가 전부 진리다. 인간의 인식체계를 동원해 해석을 덧붙이고 은유를 갖다 댈수록 대상과 시어의 거리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 시인은 관념에서 벗어나 '날(生) 이미지'를 사물에 돌려주고자 안간힘을 썼다.

'날 이미지 시'로 한국 현대시의 지평을 넓힌 시인 오규원이 세상을 떠난 지 꼭 10년이 됐다. 동료·후배 문인들은 기일인 다음 달 2일을 전후로 사진전을 열고 추모 시집을 펴내며 고인을 기린다.

출판인으로, 대학의 시학 교수로 활동한 시인은 1991년 만성 폐쇄성 폐질환을 얻고 공기 맑은 시골에서 휴양했다. 이 시기 사진을 집중적으로 찍었고 1994∼1995년에는 월간지에 포토에세이 형식으로 사진과 산문을 연재하기도 했다. 시인은 생전에 "내 시의 시각적 이미지가 사진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존재와 사실 그 자체를 최우선에 두는 그의 시학과 사진은 무척 가까워 보인다.



사진전문 갤러리 류가헌에서는 필름에 담긴 시인의 시선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는 특별전 '봄은 자유다 마음대로 뛰어라'가 31일부터 다음달 26일까지 열린다. 시인이 남긴 사진 1천여 컷 중 20컷을 엄선했다. 시인의 육성이 담긴 추모영상과 거동이 불편해진 이후 새들을 관찰하는 데 사용한 망원경, 병상에서 시를 쓰는 도구였던 PDA와 보이스펜 등 유품이 함께 전시된다.

전시기간 매주 토·일요일 오후에는 시인 이원·서정학·최하연·황인숙·조용미, 소설가 하성란·윤성희·김미월 등 제자 문인들이 관람객을 안내한다. 사진전문 출판사 '눈빛'은 시인의 사진 56컷을 모은 사진집 '무릉의 저녁'을 출간한다. 무릉은 시인이 1993년 여름부터 1996년 봄까지 머문 강원도 영월군의 마을 이름이다.

이수명·김행숙·김언·오은·최규승·백은선·김종연 등 현재 활발히 활동하는 시인 48명은 추모시집 '노점의 빈 의자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를 낸다. '버스정거장에서', '대방동 조흥은행과 주택은행 사이' 등 시인의 작품 네 편 가운데 각자 한 편씩 골라 새롭게 썼다. 습작생이라면 한 번쯤 접해봤을 시인의 저서 '현대시작법'(1990)을 토대로 한 후배 시인들의 강좌도 마련됐다. 김혜순·장석남·함민복·최정례 시인이 다음달 한 차례씩 류가헌에서 강의한다.



대기업에서 홍보지 담당으로 일하다가 도서출판 '문장사'를 창업한 시인은 출판편집에도 탁월한 감각을 지녔다. 한 가지 색깔로 둘레를 치고 가운데 네모 안에는 시인이 고른 바탕색에 캐리커처를 새긴 오늘날 '문학과지성 시인선'의 표지를 그가 디자인했다. 이제 시인선 500호 발간을 앞둔 문학과지성사는 시인의 첫 시집 '분명한 사건'(1971)을 복간해 기일에 맞춰 펴낸다.

김병익 문학평론가는 복간 시집의 발문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어느 날, 그는 문지 시집 장정이 촌스러우니 바꾸라고 야단치듯 하며 표지 도안 하나를 내밀었다. (…) 100호 단위마다 큰 바탕색만 바꾸며 35년 동안 그 구조를 유지해오면서도 여전한 모범을 자랑하며 '문지 시인선'의 높은 품격과 신선한 세련성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오규원의 이 높은 심미안이 잡아준 틀 덕분이다."



dad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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