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북방을 개척한 김종서 장군의 이름이 600여 년 만에 이지스 구축함에 새겨져 모습을 드러냈다.
해군의 최신예 정조대왕급 이지스 구축함(KDX-Ⅲ Batch-Ⅱ) 3번함이자 마지막 함정인 ‘대호 김종서함’이 30일 HD현대중공업 울산 조선소에서 진수됐다. 경하 톤수 8,200t(톤), 길이 170m, 폭 21m 크기로 앞으로 시운전 등을 거쳐 2027년 말 해군에 인도돼 바다를 지키게 된다. 특히 국내 기술로 연구 개발된 함대지 유도탄과 성능이 개량된 해상 유도 무기, 한국형 수직 발사대가 탑재돼 대지, 대함, 대공 대응력이 높아진 것으로 기대된다.
정기선 HD현대 회장은 "대호 김종서함을 비롯해 지난 50년간 축적한 함정 건조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의 안보를 지키는 글로벌 해양 방산업체로 도약하겠다"라고 말했다.
이재명 대통령도 김종서 장군의 용맹함과 기개를 잇는 해군의 최신예 이지스 구축함 대호 김종서함의 진수를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전했다.
불과 두 달 전에도 다른 역사 속 인물도 군함으로 돌아왔다. 고려 시대 거란과의 담판으로 강동 6주를 확보한 서희 장군이다. 해군은 지난 7월 최신예 3,600톤급 잠수함 장보고-Ⅲ Batch-Ⅱ 2번함을 ‘서희함’으로 명명했다. 서희함도 올해 하반기 진수를 앞두고 있다.
▲같은 영웅인데 누구는 구축함, 누구는 잠수함
둘 다 외국의 침략에 맞서 국경을 지킨 영웅들인데 김종서는 구축함이, 서희는 잠수함이 된 건 해군 군함의 함종마다 따로 내려오는 족보가 있어서다.
군함명은 조선소가 아니라 해군 본부 함명 제정 위원회가 역사적 사실, 군과의 연관성, 기존 함과의 연계성 등을 종합해 정하는데 함의 종류에 따라 후보가 될 수 있는 이름의 범위를 다르게 한다. 함종마다 함정이 계승할 역사성과 연속성을 따져 후보군을 추리는 만큼 유명하다고 큰 배가 되는 건 아니다.
또 함명은 세대를 건너 부활할 수 있다. 서울함이나 천안함처럼 기존 함정이 퇴역하더라도 해군이 계속 기억해야 한다고 여기면 신규함이 이름을 물려받기도 한다. 다만 각 함정에 붙는 선체 번호는 재사용하지 않는 게 원칙이다.
▲왕부터 장군까지 국가 지킨 자는 구축함
먼저 구축함은 국가 수호, 통합 등 정체성 확립에 기여해 국민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 대상이 된다. 대표적으로는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을지문덕, 양만춘, 신라의 문무대왕, 발해의 대조영, 고려의 왕건, 강감찬, 최영, 조선의 세종대왕, 율곡 이이, 충무공 이순신, 서애 류성룡, 정조대왕, 다산 정약용 등이 구축함이 됐다. 대호 김종서가 구축함으로 재탄생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김종서는 세종 때 두만강 일대 6진 개척을 이끌어 조선의 북방 영토를 넓히는 공을 세웠다. 해군은 여기에 이지스 구축함의 강력한 전투력과 기동성 등을 연상시키고자 ‘큰 호랑이’를 뜻하는 김종서의 호 ‘대호(大虎)’를 함명에 달았다.
유도탄 고속함에는 해군 창설 이후 실제 해전에서 귀감이 된 참전용사들의 혼이 담겼다. 1번함 ‘윤영하함’부터 한상국, 조천형, 황도현, 서후원, 박동혁까지 제2연평해전 전사자 6명의 희생과 헌신 정신이 군함에 남았다.
▲학자에서 독립운동가로 넓어진 잠수함
잠수함은 구축함과 성격이 조금 다르다.
해군은 잠수함의 경우 군사력과 해양력 강화, 외세와의 항쟁과 독립 운동, 과학 기술 발전과 외교 성과 달성 등을 통해 공적을 남긴 인물을 우선으로 한다. 잠수함 크기와 건조 시기에 따라 색깔이 더 뚜렷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1,200t 급 장보고급에는 장보고를 비롯해 최무선, 이종무, 나대용 같이 주로 국난 극복에 이름을 남긴 이들이 등장했다. 1,800t 급 손원일급으로 넘어가면서는 손원일, 안중근, 김좌진, 윤봉길, 유관순처럼 해군력 건설과 독립 운동을 주도한 이들이 흐름을 이어받았다. 3,000t 급 도산 안창호급에서도 도산 안창호, 안무, 신채호가 영예를 안았다.
3,600t 급 장보고-Ⅲ Batch-Ⅱ로 들어서면서 과학 기술과 외교가 주목받게 됐다. 1번함은 조선의 과학자 ‘장영실함’으로 해군은 독자 기술이 집약된 최신 잠수함이라는 상징성을 가지도록 장영실을 택했다.
2번함은 ‘서희함’이 됐다. 서희는 993년 거란의 침공 당시 적장 소손녕과 담판을 벌여 적군을 철수시키고 압록강 동쪽 강동 6주를 얻은 바 있다. 이에 해군은 그의 외교적 업적이 해군의 핵심 전력인 잠수함에 적합하다고 판단해 2번함명으로 낙점했다.
▲정조대왕? 대호 김종서?...‘두 이름’ 비밀
함명을 보면 헷갈리는 게 있다. 대호 김종서함인데 왜 정조대왕급이라고 앞에 붙이는지다.
함형과 기능이 비슷한 함정을 여러 척 만들면 첫 번째 함정, 즉 1번함의 이름을 전체 함급의 명칭으로 부르는 게 일반적이다. 예시로 이지스 구축함인 정조대왕급의 1번함은 정조대왕함이다. 따라서 2번함인 다산 정약용함과 3번함 대호 김종서함도 정조대왕급에 속한다. 그래서 이름 앞에 함급을 달아 함형과 기능을 구분하는 거다.
잠수함도 똑같다. 3,600t 급 장보고-Ⅲ Batch-Ⅱ 1번함은 장영실함이다. 그래서 2번함인 서희함도 함급은 ‘장영실급’인 거다.
한 문장으로 1번함의 이름이 일종의 ‘가문의 성’이 되는 셈이다.
끝으로 배치(Batch)는 동일 함정의 성능 개량 단계를 뜻하는 거고 Ⅰ, Ⅱ, Ⅲ 등은 1, 2, 3차 등 차수를 가리키는 거다.
▲사람 아닌 지역도 된다
사람이 아니어도 된다. 대표적인 게 호위함과 초계함으로 각각 대도시와 중소 도시와 연결된다.
특히 해군은 울산급, 인천급, 대구급, 충남급과 같이 특별·광역시와 도·도청 소재지 등 지역명을 호위함에 붙인다.
지난 7월 서희함과 함께 가장 근래 공개된 충남급 호위함 5번함도 평택함이다. 평택함이 배치되는 해군 제2함대 사령부가 서해를 아우르는 평택 해군 기지에 있다는 점이 영향을 미쳤다.
초계함과 기뢰를 탐색하는 소해함에는 중소 도시의 이름이 붙는 전통이 있고 구조함 등 지원 함정도 지명을 사용하는 나름의 작명법이 있다.
상륙함은 한층 직관적이다. 고준봉함, 비로봉함, 향로봉함, 성인봉함에 이어 천왕봉함, 천자봉함, 일출봉함, 노적봉함처럼 산봉우리에서 따왔는데 병력을 해안에 상륙시켜 목표 고지를 점령하자는 의미가 담겼다. 독도함과 마라도함처럼 대형 수송함에는 주요 도서명이 쓰이는 중이다.
▲이름 보면 함종 보인다
결국 함명만 제대로 읽을 줄 알아도 어떤 배인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오늘(30일) 새로 물에 뜬 '대호 김종서함'도 우리의 오랜 역사에 한 획을 긋게 됐다.
600년 전 두만강 일대를 호령하던 북방의 장수는 내년 12월 해군에 인도돼 정조대왕, 다산 정약용과 함께 바다를 누비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