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봉인 풀렸다…푸틴이 불러낸 '핵 망령'

입력 2022-05-10 17:32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일으킨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냉전 종식 후 30여년간 봉인됐던 '핵'이라는 위험한 망령의 고삐도 함께 풀리고 있다.

9일(현지시간) 미 월스트리트저널은 '핵 망령'은 핵전쟁 자체의 위험뿐 아니라 냉전 시대에나 썼던 국내 정치 도구로서의 핵 협박 부활, 핵무기를 손에 넣고자 하는 국가들의 등장을 통칭한다고 설명하며 이같이 진단했다.

그러면서 우크라이나 전쟁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종결될지와 무관하게 세계는 앞으로 수년간 이런 위험을 떠안은 채 살아가게 될 것으로 전망했다. 또 푸틴 대통령의 전쟁이 실패로 귀결될 경우 그 위험의 강도가 어느 정도는 줄어들겠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무엇보다 세계가 직면한 가장 큰 위험으로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수렁에 빠진 러시아군이 전세를 뒤집으려고 소형 전략 핵탄두 등을 이용한 핵 공격을 감행하는 것이 꼽힌다.

실제로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서방과의 핵 충돌 가능성이 상당하다고 경고하면서 이런 위험이 엄연한 현실임을 새삼 일깨운 바 있다.



미국과 소련이 경쟁한 냉전시대에 주기적으로 등장했던 '핵 협박'은 이미 시작됐다.

오늘날 미국과 러시아는 양측의 불화가 핵공격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넌지시 암시하는 것만으로도 지정학적 갈등 상황에서 상대방을 단념시킬 수 있을 것이란 기대에서 핵 위협을 동원하고 있다고 WSJ은 진단했다.

국가안보 전문가인 리처드 베츠 미 컬럼비아대 교수는 이와 관련해 "핵 협박은 언제나 매우 미묘하고, 모호하다"며 "그것은 명확한 위협보다 '가능성'이라는 유령을 배양하는 효과를 낸다. 그것이 우리가 지금 푸틴으로 인해 처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러시아가 최근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좀 더 직접적으로 암시하기 시작했음에도 미국 등 서방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오히려 강화한 것으로 볼 때 현재까지는 이 같은 핵 협박이 먹히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고 WSJ은 짚었다.

하지만 중국이 만에 하나 대만 침공을 선택할 경우 국제사회가 개입을 포기하도록 핵 협박을 하는 방법을 중국이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아직 안심하긴 이르다고 이 신문은 경고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역시 남한이나 일본을 위협하는 방법으로 핵 협박 카드를 고수할 수 있고, 핵보유국인 인도나 파키스탄 역시 러시아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고 신문은 덧붙였다.

핵 협박보다 훨씬 더 미묘한 위험은 현재 핵무기 개발 직전에 있거나 핵 개발을 노리고 있는 국가들이 핵무기를 손에 넣는 것이야말로 '제2의 우크라이나'가 되는 것을 막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인식하는 것이라고 WSJ은 지적했다.

소련 해체 직후 1천900기의 핵탄두를 갖춘 세계 3위의 핵보유국이던 우크라이나는 1994년 미국, 영국, 러시아 등과 '부다페스트 각서'를 체결하고 핵무기를 포기하는 대가로 영토의 안전성과 독립적 주권을 보장받았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안보를 약속했던 당사국인 러시아로부터 침공받았다.

많은 나라가 우크라이나가 당시 포기한 핵탄두를 여전히 갖고 있었더라면 러시아가 침공을 감행하는 모험을 할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한다고 WSJ은 전했다.

이는 서방과 핵 협상을 진행 중인 이란은 물론 이란의 주적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UAE) 등도 품고 있는 생각이라면서, 따라서 푸틴 대통령은 국제사회를 '핵 확산'이라는 새로운 시대로 이끌고 있는 셈이라고 이 신문은 진단했다.

(사진=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