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통 수준의 서울 아파트' 8억9,700만원
8억 9,751만원. 2019년 12월 기준 서울 아파트의 중위가격, 즉 중간값입니다. 서울에서 '남들 만한' 아파트에서 살고 싶으면 9억원 가까운 돈이 있어야 하는 것이죠.
남들 만한, 보통 수준의 서울 집값은 2년 6개월 동안 가파르게 올랐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2017년 5월 5억1,588만원이던 중위가격은 1년 반 뒤인 2018년 12월 8억4,502만원으로 훌쩍 뛰었습니다. 또 다시 1년 뒤 '보통 수준의 서울 아파트'를 사려면 9억원에 가까운 돈이 필요하게 됐습니다. 대통령은 "서울 부동산 시장이 안정됐다"는데 정작 중위가격은 5천만원이나 뛴 것이죠.
평범한 직장 초년생이 일년을 꼬박 일해도 5천만원을 벌지 못하는게 현실인데 가만히 있어도 서울 집값은 5천만원이 오른 겁니다. 2030 무주택 청년들이 느끼는 '보통 수준의 박탈감'이 이런 것 아닐까요.
▲ 33주 연속, 28주 연속…냉탕-온탕 오가는 시장
33주 연속 집값 하락. 정부가 주택시장 안정을 주장하는 핵심 근거입니다. 2018년 9·13 부동산대책 이후 33주 연속으로 서울 집값이 하락했다는 것이죠. 손에 꼽을만큼 긴 기간의 집값 하락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9·13 대책의 약발이 지속된 기간은 8개월 정도가 다였습니다.
시장은 적응했고 또 다시 부동산 시장으로 돈이 몰렸습니다. 28주 연속 집값 상승. 결국 지금까지 28주 연속으로 오르고 있습니다. 12·16 대책으로 강남 4구의 집값은 진정되고 있다지만 서울은 소폭이나마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습니다.
가격은 오를 수도 있고 내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30주 넘게 집값이 떨어질 때 시장 참여자들은 어떤 생각을 가질까요? 집 가진 사람들은 불안감에 휩싸일 겁니다. "일본식 집값 폭락이 온다", "지금보다 두배는 더 떨어져야 한다"는 얘기들이 쉽게 들렸습니다.
하락세를 끊고 20주 넘게 집값이 오르면요? 급매물로 집을 내놨거나, 아직 집을 마련하지 못한 사람들은 또다시 불안감을 갖게 됩니다. "지금이 서울에 집을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 아닐까?", "수도권 외곽 아파트라도 사놔야 하는 건가?" 처럼요.
고강도 부동산대책 한번에 장기간 찬바람이 불다가도 규제의 약발이 다 하면 다시 장기간 뜨겁게 달아오르는. 그래서 또 다시 정부가 '고강도 규제'를 언급하고 있는 시장. 시장의 불안감은 과연 누가 조장하는 것일까요?
집값 기사를 쓰기에 지금처럼 좋은 시기는 없는 것 같습니다. 매주 숫자 하나씩만 바꿔주면 되죠(가령 28주 연속→29주 연속). 다만 지금 같은 시장을 과연 '건강한 시장'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 경험해보지 못한 '풍부한 유동성'
누가 뭐라고 하든 서울 집값은 꾸준히 올랐습니다. 중위가격이 2년 6개월 동안 70%가 올랐든, 정부 발표대로 11.46%(한국감정원)가 올랐든 말이죠.
그렇다면 집값은 왜 올랐을까요? 먼저 정부가 내세우는 주요 이유는 '풍부한 유동성'입니다. 쉽게 말해 시장에 돈이 많이 풀렸다는 것이죠.
맞습니다. 지금 우리 경제는 '과거에 겪어보지 못했던 저금리'를 경험하고 있는 중입니다. 전 세계적으로도 마찬가지죠. 다만 차이가 있다면 연일 사상 최고점을 갈아치우는 미국·일본과는 달리 우리 증시는 여전히 박스권을 헤매고 있다는 점이죠.
여기에 40조 원에 가까운 토지보상금(38조원), 500조원을 훌쩍 넘긴 슈퍼예산(512조원)까지. 유동성 폭탄은 과연 누가 손에 쥐고 있는 것일까요?
▲ 그리고 前 정부…규제의 역설
문재인 정부가 유동성과 함께 서울 집값이 오른 두 번째 이유로 꼽는 게 바로 '전(前) 정부'의 책임입니다. 집값 정책의 주무부처인 국토교통부도, 서울시정을 이끌어가는 서울시장도 집값 상승의 근거를 '전 정부의 규제완화'로 꼽고 있습니다. 즉, 전 정부에서 규제를 풀어줬기 때문에 집값이 지금까지 오른다는 겁니다.
"지난 10여년 간 부동산을 중심으로 재산·소득 불평등이 심해졌다. 이는 지난 보수 정부의 무분별한 규제 완화 정책이 원인." -박원순 서울시장
"현 정부에서 전국 주택매매가격은 이전 정부의 규제완화 및 주택경기 부양책 영향으로 상승 압력이 존재…" -국토교통부
그렇다면 궁금증이 하나 생깁니다. 이전 정부에서 규제를 풀어줬는데 그때 집값이 안 오르고 지금에서야 오르는 걸까? 개인적으로 이 역시도 '시장의 심리'로 보고 싶습니다. 서울에서 꾸준히 공급이 이어질 것이라는 신호가 나오면 조급함이 사라집니다. 당장 집을 안사고 기다렸다가 사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규제 완화가 오히려 매수 심리를 낮춘 셈이죠.
하지만 부동산 시장에 규제의 칼날을 들이미는 순간 시장은 불안감에 놓입니다. 서울 주택보급은 충분한 상황이라지만 많은 수요자들은 깨끗하게 좋은 시설의 새 아파트에 살고 싶을 겁니다. 새 아파트 수요는 여전한데 공급이 줄어들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생기죠. 정비사업은 멈춰섰고, 서울 내 개발 호재는 넘칩니다. 100:1 청약 경쟁률은 이제 익숙한 광경이 됐습니다.
12·16 대책이 시행된지 한 달. 9억·15억원대의 주택에 대한 대출규제가 이중, 삼중으로 쳐진 상태입니다. 부동산으로 흘러가는 돈을 막고, 투기수요를 잡겠다는 정부의 의지는 여전한데요. 먼저 잡아야 할 것은 '시장의 불안감'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