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스, 아직도 손으로 접니?"…박스접기 최강자를 만났다 [배성재의 Fact-tory-3]

입력 2019-11-08 17:31
수정 2019-11-08 17:46
[Fact-tory ③] 에이스기계 본사공장 편
한국거래소 직원들은 상장기업을 평가할 때마다 현장답사를 나갑니다. 기업의 본령이 물건을 만들어 파는 것이라면, 공장은 그 근간이기 때문이죠.

공장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배성재의 Fact-tory는 공장을 직접 다녀보며 기업들의 기술과 경쟁력을 살펴봅니다. 공장(Factory) 속 뚜렷한 사실(Fact)과 땀 섞인 이야기(Story)를 동시에 전합니다.

['피자 박스 빠르게 접는 방법']



▲ 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 (출처: CJENM)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을 보신 분이라면 기택(송강호 분)네 가족들이 피자 박스를 접던 장면을 기억하실 겁니다. 박스를 찾으러 온 피자집 직원들이 "불량품이 많다"며 가족들을 면박 주는 모습도 나오죠. 영화 속에 나온 '피자 박스 빠르게 접는 방법'이라는 유투브 영상은 실제로 조회수 100만 뷰를 넘기며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Fact-tory가 세 번째로 다녀온 공장은 바로 이 '박스 접기'와 관련한 곳입니다. 박스 자동접착기를 만드는 에이스기계㈜의 시흥 본사 공장인데요. 자동접착기란 자동으로 박스 모양을 접어 접착시켜주는 기계입니다.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화장품, 맥주 등을 담는 박스를 대량 생산할 수 있게끔 하는 장비죠.

기택네 가족들이 맞닥뜨렸다시피 박스 접기란 많이, 정확하게 접는 것이 관건입니다. 주문자가 원하는 형태로 생산하는 능력도 핵심적인데요. 기술이 부족했던 탓에 자동접착기는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100% 수입에 의존해왔던 장비였습니다. 자동접착기 국내점유율 70% 달성에 더해, 미국·유럽에 1,000대 가량을 수출 중인 에이스기계의 시흥 본사공장이 남달라 보인 이유였습니다.

[Fact-]

· 위치: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

· 부지 면적: 8,473 제곱미터

· 인원: 29명 (회사 전체: 43명)

· 생산 제품: 펄프 및 종이가공용 기계



◎ 첫 인상 - 의외로 정적인 공장

에이스기계 본사는 시화호를 매립해 조성한 산업단지 시화MTV(멀티테크노밸리)에 입주해 있습니다. 형태는 아파트 6층 정도의 높이의 거대한 창고형 공장이었습니다. 공장의 1/3 가량은 현재 협력업체에 임차를 내준 상태였습니다.

사실 엄청나게 분주할 줄 알았습니다. '박스를 미친 듯이 접을 테니, 볼수록 빠져드는 중독성 있는 영상도 만들어봐야겠다'던 제 각오는 공장에 들어간 순간 보기 좋게 깨졌습니다. 공장은 정밀하게 이루어진 거대한 자동접착기들로 채워져 있더군요. 공장 직원들은 자동접착기 옆에서 세밀한 작동들을 시험 중이었습니다.

재밌는 영상을 만들 수 없던 점은 유감이었지만, 오히려 기계를 가까이서 들여다보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특히 가장 앞쪽에 있는 자동접착기 3대는 곧 미국으로 수출을 앞두고 있던 제품이었습니다.

◎ 제품 - 시그니처 엘리트(Elite)

에이스기계의 대표 모델은 '시그니처 엘리트'라는 모델입니다. 지금까지 에이스기계가 가장 많이 수출한 모델이기도 한데요. 길이는 커스터마이징마다 차이가 있지만 약 15m에서 25m에 달합니다.

자동화 기계인 만큼 속도도 중요한 요소인데요. 시그니처 엘리트의 벨트 속도는 분당 550m의 고속입니다. 고객사의 커스터마이징에 따라 벨트 속도를 최대 650m까지 끌어올릴 수도 있습니다. 위에 있는 영상을 통해 그 속도를 체감하실 수 있을 겁니다.



◎ 제품 분석 - 맞춤, 신속, 정확

시그니처 엘리트는 미국의 세계적인 패키징 대기업인 웨스트락이나 그라픽패키징인터네셔널(GPI) 등의 접착기 구매 순위 중 선두권에 있는 모델입니다. 커스터마이징(맞춤)과 신속성, 신뢰성이 상당히 높다는 의미죠.

이중 신속성의 경우엔 경쟁사와 직접 비교가 가능한데요. 경쟁사인 스위스 제조사 밥스트(Bobst)의 모델 'MASTERFOLD 75'의 벨트 속도가 분당 최대 600m인 점을 감안하면, 50m 가량이 빠릅니다.

박스를 만드는 기계다보니 정작 어떤 박스를 만드는지 와 닿지 않으실 텐데요. 시그니처 엘리트의 주요 고객으로는 화장품이나 양주 회사들이 있다고 하네요. 대표적으로는 로레알이나 스코티쉬위스키 브랜드, 맥주 6병들이의 박스 등이 그 제품들이라고 합니다.

[-Story]

◎ 2014년 이전한 공장이다

에이스기계는 기존에 시화산업단지에 공장을 두고 있었습니다. 2014년 초 시화MTV(멀티테크노밸리)가 개발되면서 이전해왔는데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접착기들을 고급화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연구개발능력을 늘리고 자동접착기 디자인도 미려하게 바꾼 것이 이 시기라고 하네요. 덕분에 기계 가격도 좀 더 올라갔다는 후문입니다.

다만 앞으로 시흥 본사공장은 연구개발에 집중하고, 생산은 점차 베트남 호찌민 인근에 있는 지사로 옮겨갈 계획이라고 합니다. 내수는 줄어들고 비용은 높아지는 한국 제조업의 고민을 에이스기계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 한 번 실패한 작품이었다

에이스기계는 1993년에 시작한 회사입니다. 회사를 만든 이철 대표이사는 일본 등지에서 자동접착기를 수입해 판매하는 일로 이 업계에 발을 들였다고 하는데요. 자동접착기를 직접 만들어도 되겠다는 생각에 '맨땅에 헤딩'하듯 기술 개발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처음으로 만든 자동접착기는 '에이스'라는 제품이었습니다. 하지만 해외 시장의 반응은 차가웠습니다. 미국 포장업계 관계자들로부터 "소재와 설계가 수준 미달이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하네요. 이후 에이스기계는 반년 간 공장을 닫고 제품 개발에만 집중하는 결단을 내립니다. 그 과정을 거쳐 새로 나온 '시그니쳐' 브랜드들은 영국에서 소위 '대박'을 쳤습니다. 실적이 좋을 땐 해마다 유럽과 미국 시장에 각각 최대 20대까지 수출을 했다고 하네요.

◎ '백만(1,000,000) 마일리지'

이철 에이스기계 대표의 항공사 마일리지는 백만이 넘는다고 합니다. 약 20년째 매해마다 해외를 10번씩 다녀온 결과입니다. 출국 이유도 다양했습니다. 전시회마다 쫓아다니며 경쟁사의 모델을 확인하는 등 뒤쳐진 기술을 따라잡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이제는 역으로 해외에서 에이스기계로 문의하는 일이 잦다고 합니다. 콧대 높던 미국의 페키징 대기업들이 새로운 박스형태를 론칭할 때 먼저 제안서를 보내온다고 합니다. 제조가 어려워서 자동화가 안 되는 제품들을 빠르게, 높은 가성비로 만들기 때문이라네요. 실제로 공장을 방문했을 때, 미국의 패키징 대기업인 그라픽패키징인터네셔널(GPI)의 제품이 시험 중이기도 했습니다.

에이스기계는 매출 110억원 규모의 작은 회사임에도 '드루파(Drupa) 2020'에 참가합니다. 드루파는 4년에 한 번씩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의 인쇄전시회인데요. 에이스기계의 기술이 세계무대에 설 만큼 하이엔드 수준이라는 증거겠지요. 전시회를 쫓아다니다 이젠 전시회에 출품하는 회사가 된 셈입니다. 박스 접는 기계의 국내 최강자, 에이스기계 본사공장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