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식 칼럼] ‘매드맥스’ ‘차이나타운’ 대중문화계 신모계사회에 빠지다

입력 2015-05-24 12:58
수정 2015-05-28 20:57
▲ 신모계사회의 형태를 보여준 영화 영화 ‘매드맥스’(사진 = 영화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 스틸컷)

영화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Mad Max-Fury Road)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자동차 추격신으로 관객들의 시선을 한껏 잡아두는 화제작이 됐다. 영화 ‘매드맥스’가 호평을 받는 것은 이런 액션 장면들이 선사하는 시각적인 효과 때문만이 아니라 그 안에 담겨 있는 주제의식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주제의식은 특히 액션 영화와는 거리가 먼 여성관객들에게 크게 어필하고 있다. 상업적인 관점에 보았을 때, 남성은 물론 여성까지 아우를 수 있어 보인다. 물론 결말은 일부 남성들이 낯설게 느낄만한 요소가 있는 것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일부를 버리고 더 큰 부분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영화 스토리의 선택이 이뤄졌을 것이다.

그 낯선 대상은 바로 신(新)모계적인 관점이다. 구(舊)모계의 경우에는 여성이 임신과 출산을 중심으로 가족은 물론 사회를 이끌어가는 방식이 특징으로 부각된다. 사냥과 수렵, 전쟁이라는 남성성이 강화된 형태가 두드러져 보였다. 신모계에서는 남성성과 별개의 정체성과 다양한 활동분야를 보인다. 임신과 출산이라는 관점에서 벗어나 좀 더 능동적인 주체로 부각이 되며 새로운 세상 질서를 만들어가는 측면이 강조된다. 개인의 자유와 자아실현적인측면이 강화된 것이 신모계사회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영화 ‘매드맥스’에서는 인류가 멸망의 위험에 처한 미래 22세기를 배경으로 임페라토르 퓨리오사(샤를리즈 테론 분)가 악당 임모탄의 수중에서 벗어나 여성들을 데리고 낙원으로 일컬어지는 그린 월드로 탈출하는 과정이 담겨 있다. 여기에서 임모탄은 여성들을 소유하고 자신의 불멸을 꿈꾸는 가부장제의 화신으로 등장한다. 그가 여러 명의 여성들에게 자신의 아이를 임신시키거나 모유를 대량으로 생산하게 만들어 소수의 남성들만이 향유하게 만다는 것은 여성착취적인 구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설정이었다.

결론은 가부장제, 부계사회의 붕괴인데 맥스 로켓탄스키(톰 하디 분)의 태도에서 이는 단적으로 부각된다. 그는 퓨리오사가 임모탄을 몰아내고 승리하게 만드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지만, 스스로 다시 방랑의 길을 떠난다. 영화 ‘그레비티’에서 딸을 잃은 스톤 박사(산드라 블록 분)가 딸로 인해 생존의 의지를 다지는 가운데 매트(조지 클루니 분)가 그녀를 살리고 유유히 사라져가는 것과 닮아 있다.

그녀에게 남편은 존재감도 없고 오직 딸과의 관계성만이 중요했다. 한편, ‘매드맥스’에서 맥스는 퓨리오사의 남편이 되거나 임모탄의 공간에 자리를 잡을 생각도 하지 않는다. 농경의 소유자가 아니라 유목의 노마드가 되는 것이다. 이로써 신세계는 모계가 중심이 되는 것임을 분명하게 밝힌다.

▲ 모계사회의 특징을 담아낸 영화 ‘차이나타운’의 김혜수와 김고은(사진 = 퍼스트룩)

한국영화 ‘차이나타운’도 어두운 조직범죄의 세계를 다루고 있지만, 모계사회의 특징을 담아내고 있는 것은 공통적이다. 엄마(김혜수 분)는 엄마를 자신의 손으로 죽음에 이르고 조직의 보스 자리에 앉았지만, 다시 일영(김고은 분)의 손에 죽음을 맞게 된다. 하지만 엄마는 그 조직의 후계자로 일영을 지목하고 순순히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경쟁관계에 있는 것 같지만, 그 권력과 경제력의 승계는 여성에서 여성으로 이어진다.

아버지는 아들의 경쟁관계이며, 극복의 대상이라는 서구적 개념과는 사뭇 달리 엄마와 딸의 관계는 좀 더 상대적이고 유연하다. 최소한 남자를 두고 오이디푸스처럼 싸우지는 않으니 말이다. 한편, 다른 남성들은 하나의 수단이라는 측면이 도드라지게 부각된다. 여기에서 모계사회적인 특징은 혈연적인 의미가 아니라 비혈연적인 나아가 대안 가족적인 의미가 강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영화의 주제의식대로 비혈연적인 대안가족의 신모계성이 강화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본능적인 점보다는 이성적인 측면에 더 기울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혈연적인 경우에도 모계중심이 될 것이라는 미래예측을 담아내고 있다.

드라마 ‘착하지 않는 여자들’에서는 질서에 유순하게 고분고분하거나 다른 타자-남성에게 매이거나 흔들리지 않는 여성들을 그려낸다. 남성들 사이에서 삼각, 사각의 로맨스를 그리거나 신분상승을 남성에게 의존하려는 행태도 찾아볼 수가 없다. 어머니의 딸 다시 어머니의 딸이라는 모계적인 차원의 이야기가 중심에 있으며, 어머니와 그 어머니의 상대점에 있는 여자들이거나 그 딸들의 상대점에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서사 전개의 중심이다.

이런 작품들이 본격화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사회도 신모계 사회에 들어서 있다. 여성들은 더 이상 남성이 되고 싶어하지 않으며, 독자적인 정체성과 질서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는 비단 처가살이나 처가를 중심으로 한 생활문화질서의 형성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야만에서 문명으로 사회경제적으로 수평적이고 인권화 된 사회가 될수록 그러한 진전이 가속화 된다.

그것이 신모계사회의 배경이다. 또한 고성장기가 아니라 저성장의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새로운 그렇지만 위험이 포함되는 모험의 시대는 가고 안정과 점증 그리고 유지 보수의 시대가 될수록 신모계사회는 강화된다. 그러나 현실이 완전히 그렇게 변했기보다는 현실이 이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대중문화를 통해 대리투영하거나 만족감을 추구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할 수도 있다.

이런 현상들은 남성들이 위기의식을 느낄만 하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사필귀정으로 가고 있는 것이겠다. 그러나 과잉은 언제나 신모계 사회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쏠리는 것은 언제나 바로잡힘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남성과 여성의 양성성이 상호보완을 할 때 서로 상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동아방송예술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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