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팔로알토캐피탈(Palo Alto Capital)과 에스더블유인베스트먼트, 엘로힘파트너스가 휴머노이드 로봇 기업 어질리티 로보틱스(Agility Robotics)의 나스닥 상장 PIPE(상장지분 사모투자)에 참여했다. 미국 휴머노이드 첫 상장사에 투자 5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3사는 공동 업무집행조합원(Co-GP)으로 결성한 신기술사업투자조합 등 크로스보더 투자기구를 통해 어질리티가 스팩(SPAC) 합병 과정에서 진행한 PIPE에 투자했다. SW인베스트먼트와 팔로알토캐피탈은 지난해 시리즈C 라운드에도 참여했다.
국내 증권사와 캐피탈사 등도 출자자(LP)로 참여했다. 투자 규모는 공개되지 않았으나 업계에선 '수백억원 규모'라는 분석이 나온다. SW인베스트먼트와 엘로힘파트너스는 국내에서 꾸준히 미국 첨단기술 기업에 투자해온 투자사다. 해외 딜 소싱역량과 클로징 역량도 LP들 사이에서 높게 평가 받고 있다.
어질리티 로보틱스는 4일(현지 시간) 처칠 캐피탈 XI(Churchill Capital Corp XI)과 합병을 마무리하고 5일 나스닥에 티커 'AGLT'로 입성했다. 합병 전 기업가치(프리머니)는 25억 달러, 원화로 3조6000억원 안팎이다. 지난 2일 열린 처칠 XI 주주총회에서는 84% 이상 찬성으로 합병안이 가결됐다.
어질리티는 이번 상장으로 약 4억6500만 달러(약 6700억원)를 조달했다. 처칠 XI 신탁계좌 약 1억6400만 달러, 주당 10달러에 발행한 보통주 PIPE 약 2억100만 달러, 합병 발표 직후 별도 유치한 1억 달러로 구성된다. 애플 아이폰을 생산하는 세계 최대 전자제품 위탁생산 기업 폭스콘(Foxconn)가 PIPE의 리드 투자자로 나서 휴머노이드 양산 파트너 후보로 이름을 올렸다. DCVC와 셰플러(Schaeffler), 소니, MFV파트너스, 아비코(Abico) 등 기존 주주도 후속 출자에 나섰다. 기존 주주들이 상장 단계에서 추가로 자금을 댄 가운데 한국 3사 컨소시엄도 함께 참여한 구조다. 아마존, 도요타 현상서 6만5000시간 실전 경험 어질리티는 상업 배치 실적을 갖춘 휴머노이드 기업으로는 미국 증시 첫 상장 사례다. 현대차그룹 보스턴다이내믹스가 내년 상장을 준비하는 가운데 한발 앞서 나스닥에 입성했다. 회사를 이끄는 페기 존슨 최고경영자(CEO)는 퀄컴에서 24년간 엔지니어와 사업개발을 거쳐 마이크로소프트 사업개발 총괄 부사장(EVP), 매직리프 CEO를 지낸 인물이다. 2018년부터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 이사회에도 몸담고 있다.
시연 영상으로 주목받는 휴머노이드 기업은 많지만 유료 고객 현장에서 매일 가동되는 로봇을 가진 곳은 어질리티가 사실상 유일하다는 평가다. 투자자들이 꼽는 가장 큰 강점도 이 실전 배치 실적이다.
이족보행 휴머노이드 '디지트(Digit)'는 북미 9개 고객 시설에서 가동 중이다. 누적 작업시간은 6만5000시간을 넘겼다. GXO 로지스틱스는 2024년 조지아 물류센터에서 휴머노이드로는 처음 정식 상업 배치를 시작했고, 지난달 노스캐롤라이나·테네시 시설로 계약을 넓혔다.
셰플러는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토요타 캐나다 생산법인은 파일럿을 거쳐 상업 계약으로 디지트를 운용하고 있다. 아마존도 물류센터에서 시험 운용을 이어왔다. 지난달 20일에는 농기계 업체 애그코(AGCO)와 계약을 맺고 2027년부터 캔자스 공장 조립 라인에 투입하기로 했다. 수주잔고는 3억 달러, 확보한 고객사는 30곳을 웃돈다. 어질리티, 1조달러 시장 공략주주 구성도 글로벌 전략적투자자(SI) 위주다. 지난해 4억 달러 규모 시리즈C에는 소프트뱅크, 엔비디아 벤처 부문 엔벤처스(NVentures), 아마존 산업혁신펀드, DCVC, 플레이그라운드 글로벌이 참여했다. TDK벤처스, 소니 이노베이션 펀드, 셰플러, 폭스콘도 주주 명단에 올라 있다. 주주가 곧 고객인 구조다.
파이프라인도 두텁다. '남미의 아마존'으로 불리는 메르카도 리브레(Mercado Libre)를 포함해 연 300만대 이상을 파는 글로벌 완성차 업체와 대형 부품사, 글로벌 소비재 제조사(이상 비공개)가 유료 프로그램에 들어와 있다. 미군 관련 하청 계약 2건도 논의 단계다.
사람 옆에서 일하는 휴머노이드에 안전은 곧 상업화 조건으로 평가된다. 이 영역에서 엔비디아가 첫 파트너로 고른 곳이 어질리티다. 엔비디아는 지난 6월 로봇용 풀스택 안전 시스템 '헤일로스 포 로보틱스(Halos for Robotics)'를 공개하면서 이를 안전 시스템에 통합할 첫 기업으로 어질리티를 지목했다. 헤일로스 생태계에서 로봇을 직접 만드는 휴머노이드 제조사로는 어질리티가 유일하다. 엔비디아는 어질리티를 '최초의 휴머노이드 파트너(inaugural humanoid partner)'로 소개하고 있다.
자체 양산 공장도 차별점이다. 2023년 오리건주 세일럼에 세운 휴머노이드 전용 공장 '로보팹(RoboFab)'은 연 최대 1만대를 생산할 수 있는 설비다. 외주 생산에 기대는 경쟁사와 달리 수주가 늘어도 공급 병목 없이 대응할 수 있다는 의미다. 어질리티는 이번 조달 자금을 로보팹 증설과 디지트 v5 양산, 수주 물량 이행에 투입할 계획이다. 페기 존슨 어질리티 최고경영자(CEO)는 미국 제조·유통·물류 분야 휴머노이드 시장만 1조 달러 규모로 보고 있다. 최중혁 대표 "韓 자본이 美 피지컬AI 비상장 투자, 상장에 동참 첫 사례"한국의 신기술금융사인 SW인베스트먼트와 미국 소재 사모펀드(PE)인 팔로알토캐피탈이 어질리티와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해 시리즈C 라운드(C-3 트랜치)다. 양사는 공동 GP로 C-3에 투자한 뒤 이번 상장 PIPE까지 연속 참여했다.
이번 PIPE 조합에는 엘로힘파트너스가 공동 GP로 합류했다. 엘로힘파트너스와 SW인베스트먼트는 2023년 미코세라믹스 조합을 시작으로 미국 리튬추출 기업 에너지엑스(EnergyX), 광통신 트랜시버 업체 레신저스까지 잇달아 함께 투자를 해온 사이다. 어질리티 투자 건은 양사의 네 번째 공동 GP투자건이다. 국내 딥테크와 미국 크로스보더 딜을 함께 봐 온 호흡이 상장 PIPE까지 이어졌다는 평가다.
최중혁 팔로알토캐피탈 대표는 "시리즈C-3 투자 이후 1년 이상 실제 현장 배치와 수주 현황을 지속적으로 추적해 왔다"며 "상장 단계의 밸류에이션을 감안하더라도 향후 피지컬 AI와 휴머노이드 산업의 성장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판단해 후속 투자를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실리콘밸리에서 발굴한 딜을 국내 기관자금과 연결하는 구조를 꾸준히 다듬어 왔다"며 "이번 건은 한국 자본이 미국 피지컬 AI 기업의 비상장 라운드부터 상장까지 동행한 첫 번째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덧붙였다. 피지컬AI에 집중 투자하는 실리콘밸리 VC이번 딜은 팔로알토캐피탈 최중혁 대표와 SW인베스트먼트 윤영식 이사, 그리고 엘로힘파트너스 이재호 대표가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팔로알토캐피탈은 미국 실리콘밸리에 본사를 둔 성장자본(Growth Equity) 중심의 사모투자 운용사다. 북미 인공지능(AI)·로보틱스·반도체 등 첨단기술 분야에서 시리즈B 이후 성장 단계부터 프리IPO 단계의 기업에 주로 투자한다.
실리콘밸리 현지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투자 대상을 발굴·실사하고, 국내 기관투자자를 미국 혁신기업 투자 기회와 연결하는 크로스보더 투자에 주력하고 있다. '생성형 AI에서 피지컬 AI로(Generative AI → Physical AI)'를 핵심 투자 모토로 삼아 로봇·자율 시스템 기업을 집중 발굴해 왔다. 어질리티는 이를 대표하는 포트폴리오다.
사명의 약자인 'PAC'은 팔로알토뿐 아니라 태평양(Pacific)을 뜻하기도 한다. 태평양을 사이에 둔 한국과 미국의 자본과 기술을 잇겠다는 지향을 담았다. 최중혁 대표는 신한금융투자 자동차 섹터 베스트 애널리스트 출신으로, 미시간대 경영학석사(MBA)를 마친 뒤 삼성SDI 아메리카와 SK글로벌디벨롭먼트어드바이저스를 거쳐 회사를 세웠다. 미국 로봇·피지컬 AI 기업 덱스터리티(Dexterity), 캐나다 기업용 AI 모델 개발사 코히어(Cohere) 등에 투자했다.
뉴욕=황정수 특파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