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색 강아지와 토끼, 곰을 닮은 알록달록한 미끄럼틀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놀이공원처럼 화려한 공간이지만 아이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상자처럼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에는 천창을 통해 빛이 쏟아진다. 일부 작품에서는 놀이기구 아래로 물이 차오른다. 근심 없이 즐거워야 할 놀이터에 묘한 긴장감이 감돈다.
이란 출신 화가 메디 가디안루의 작품이다. 서울 강남구 페로탕 서울에서 그의 국내 첫 개인전 ‘낙원은 아직 오지 않았다(Paradise Opens Tomorrow)’가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회화와 색연필 드로잉 등 작품 20여 점을 선보인다. 벽화 작업으로 활동을 시작한 가디안루는 2004년부터 약 8년간 이란 테헤란의 건물 외벽에 100점이 넘는 벽화를 그렸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최근작들은 전쟁이 끝나지 않은 이란에서 완성됐다. 작업실 인근에 미사일이 떨어지고 가족의 생사조차 확인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완성된 작품들은 육로로 이스탄불을 거쳐 서울에 도착했다.
어린 시절부터 불안정한 정세 속에서 자란 작가는 오랫동안 낙원과 희망의 의미를 고민해 왔다. 이란에서 나고 자란 그에게 희망은 기약 없는 기다림과도 같았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낙원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곳이면서 곧 다가올 약속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때로는 ‘곧 시작됩니다’라는 흔한 광고 문구처럼 다가오기도 한다”고 말했다.
작품 속 동물 형상의 미끄럼틀 역시 낙원을 기다리는 존재들이다. 작가는 “곧 다가올 것이라고 믿었던 낙원이 계속해서 미뤄지고, 동물들은 기약 없는 기다림 속에 머물러 있는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작가는 ‘자유 의지’가 작품의 중요한 주제라고 설명했다. 미끄럼틀을 탈 것인지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지만, 일단 올라타면 아래로 미끄러지는 것을 멈추기 어렵다. 더욱이 작품 속 미끄럼틀의 끝은 물에 잠겨 있다. 즐겁게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올지, 물속에 빠지게 될지 알 수 없는 구조다.
작가는 “우리가 어떤 구조 안에 들어가는 것은 자유롭게 할 수 있지만, 그 안의 시스템은 이미 설계돼 있다”며 “겉으로는 즐거워 보이는 것들에도 항상 뭔가 수상한 측면들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작품 속 동물들도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계단과 미끄럼틀로 이뤄진 건축적 요소”라며 “기념비나 우상 같은 측면도 있어 종교와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답보다는 질문을 제기하는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작가는 우리가 과거의 경험이나 이미 구축된 시스템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지 질문을 던진다. 전시는 12월 24일까지.
강은영 기자 qboo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