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쪽에서 얘기하는 걸 들어봐야죠." 별안간 노동청으로부터 출석 요구를 받은 사업주 A씨가 "무슨 일로 부르는 것이냐, 진정 내용이 뭐냐"고 묻자 노동감독관은 "그건 몰라요"라며 이 같이 답했다. 첫 출석에 진정을 낸 근로자와 대질 조사를 하겠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대략적인 내용은 A씨가 임금체불을 했다는 것. 무슨 임금을, 언제, 얼마나 주지 않았다는 것인지 A씨는 어떠한 정보도 없이 출석과 동시에 대질 조사를 해야만 하는 처지가 됐다.
노무사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다. A씨 대리를 맡은 노무사는 "진정 내용이 뭔지도 모르는데 대질하는 것이냐"고 물었지만 감독관은 "내용을 모른다는 이유로 출석하지 않으면 임의로 출석하지 않은 것으로 알겠다"고 했다.
7일 노동실무 연구모임 흥미로운연구소에 따르면 노동청 조사를 받는 피진정인들이 구체적인 진정 내용을 고지받지 못해 방어권 행사에 제약이 따르는 일이 드물지 않게 발생하는 중이다. 같은 '임금체불'이더라도 연장근로수당 미지급인지, 주휴수당 미지급인지를 알아야 사업주도 관련 자료를 준비해 조사에 임할 수 있다.
예컨대 "연장근로수당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근로자 측 진정이 제기될 경우 출퇴근 기록, 근로계약서 등을 미리 준비해야 한다. 퇴직금 청구에 관한 진정일 땐 근속기간·평균임금 자료가 필요하다. 주휴수당일 경우 소정근로시간 기록을 갖춰야 한다. 하지만 진정인이 무엇을 청구하는지조차 모르면 필요한 자료를 갖추기 어렵고 첫 조사에서 방어권을 행사하는 데 한계가 따른다.
형사고소 사건의 경우 고소장 열람 규정이 있다. '검사와 사법경찰관의 상호 협력과 일반적 수사 준칙에 관한 규정'은 피의자나 변호인이 필요한 사유를 소명해 고소장 등의 열람·복사를 신청할 수 있도록 한다. 다만 이 규정이 노동감독관 수사 과정에선 어디까지 적용되는지 불분명한 상태다. 실무 현장에선 "노동감독관수사규칙에 고소장 중 혐의사실 부분에 대한 열람 근거를 직접 명시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물론 고용노동부 내부 규정에 진정서 공개에 관한 근거가 마련돼 있다. '고용노동부 정보공개에 관한 규정'은 피진정인·피의자·변호인이 필요한 사유를 소명해 공개를 청구하면 진정·고소·고발 내용 중 혐의사실 부분을 공개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실무 현장에선 '조사 중'이란 이유로 공개가 거부되거나 담당 감독관 판단에 따라 공개 범위가 달라진다는 목소리가 높다. 해당 규정에 '노무사'가 청구 주체로 명시돼 있지 않다는 점도 한계로 꼽힌다.
소민안 지정노무법인 부대표 노무사는 "실제론 이 규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진성거 등은 거의 정보공개가 안 된다"며 "진정 내용을 알려주는 것도 노동감독관의 재량이 심한 데다 '수사 중인 사건'이라면서 비공개하는 논리도 앞뒤가 안 맞는데 진정은 형사 수사가 아니라 신고 사건이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업계 일각에선 진정서·고소장 중 혐의사실 부분의 열람·복사를 신청할 권리를 법률이나 대통령령에 명시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개인정보·영업비밀에 해당하거나 증거인멸·보복 우려가 있을 땐 해당 부분을 가린 뒤 공개하도록 하자는 제안이다. 조사 중이란 이유로 전체 공개를 거부할 수 없도록 막자는 것이 골자다. 출석요구서에 청구 항목, 기간, 금액을 적는 방안도 언급된다.
서면을 먼저 교환하는 절차도 대안으로 꼽힌다. 노동청도 노동위원회처럼 정확한 사유를 포함한 서면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사안을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정보를 가린 진정 요지를 피진정인에게 전달하고 피진정인은 정해진 기한 안에 답변서를 제출하도록 한 뒤 정리되지 않은 쟁점에 한해서만 출석·대질조사를 진행하는 방안이 거론된다.
소 노무사는 "형사고소를 당한 사람도 고소장을 보고 조사를 받는데 그보다 가벼운 진정사건에서 피진정인이 진정 내용도 모른 채 대질에 나가야 한다면 그건 조사가 아니라 불시에 치르는 시험"이라며 "(피진정인이 진정 내용을 알면) 다툼이 없는 부분은 인정하고 다툼이 있는 부분만 다툴 수 있기 때문에 사건이 빨리 끝날 수 있어 체불임금도 빠르게 청산된다. 피진정인의 알권리는 결국 진정인을 위한 제도"라고 말했다.
김대영 한경닷컴 기자 kd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