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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이나 노령, 사고 등으로 가족이 의사능력을 잃게 되면 생각지 못한 여러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당장 병원비나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금융기관에서 예금을 인출하거나 보험금 또는 만기가 된 정기예금을 수령하는 일부터 쉽지 않다. 부동산을 매각하거나 임대차계약을 갱신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나아가 그 가족이 회사의 경영권을 행사하는 대주주라면 주주로서의 의결권 행사까지 어려워져 회사의 존속까지 흔들릴 수 있다.
가정법원이 후견인 업무 감독
민법은 이처럼 질병, 장애, 노령 등으로 인한 정신적 제약으로 스스로 사무를 처리할 능력이 지속적으로 결여된 경우, 본인이나 배우자, 4촌 이내 친족 등 법률에서 정한 사람의 청구에 따라 가정법원이 후견을 개시하고 후견인을 선임하도록 하는 성년후견제도를 두고 있다. 이를 통해 피후견인이 재산관리와 신상보호에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성년후견이 개시되면 가정법원이 후견인의 업무를 감독하고, 후견감독인이 선임된 경우에는 후견감독인도 후견인의 업무를 살피게 된다. 이를 통해 피후견인의 재산이 함부로 처분되거나 다른 사람에게 부당하게 이전되는 등의 문제를 예방할 수 있다.
다만 성년후견제도는 어디까지나 피후견인 본인의 보호와 이익을 위한 제도라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장래 상속세를 줄이기 위해 미리 재산을 처분하거나 자녀 등 추정상속인에게 사전 증여하는 것과 같이 피후견인 본인의 이익보다 가족의 이해관계가 앞서는 재산처분은 허용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다른 가족이 무단으로 처분한 피후견인의 재산을 소송을 통해 되찾으려는 경우에도 성년후견인의 권한이나 이해상충 여부, 소송의 필요성 등을 살펴야 한다. 일반적으로 가정법원의 허가도 필요하므로, 성년후견인이 모든 법적 조치를 자유롭게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성년후견제도는 본래 피후견인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지만, 현실에서는 가족 간 갈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특히 상속이나 회사의 경영권이 얽혀 있는 경우에는 후견을 신청할 것인지, 가족 중 누가 후견인이 될 것인지 등을 두고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 속에서 정작 가장 존중받아야 할 본인의 의사는 뒷전으로 밀려나기 쉽다.
건강할 때 후견계약 체결해야
이러한 상황에 미리 대비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건강할 때 후견계약을 체결해 두는 것이다. 후견계약은 장래 질병이나 노령 등으로 스스로 사무를 처리하기 어려워질 경우를 대비해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을 미리 정해 두는 제도이다. 의사능력이 충분할 때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임의후견인으로 정하고, 재산관리나 신상보호에 관한 사무를 어느 범위까지 맡길 것인지 등을 공정증서로 작성해 등기해 둘 수 있다. 이후 실제로 정신적 제약으로 사무처리에 어려움이 생기면 가정법원이 임의후견감독인을 선임하면서 후견계약의 효력이 발생하게 된다.
임의후견의 가장 큰 장점은 자신의 의사를 미리 반영할 수 있다는 데 있다. 누구에게 자신의 일을 맡길 것인지, 어떤 일을 맡길 것인지, 앞으로 자신의 재산과 생활을 어떻게 관리하기를 바라는지 등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이는 장래 가족 간 불필요한 갈등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혹시라도 스스로 의사를 표현하기 어려운 상황이 오더라도 자신의 뜻이 최대한 존중받을 수 있도록 하는 준비이기도 하다.
우리는 노후를 준비하면서 연금이나 보험을 알아보고, 건강을 관리하며, 재산을 어떻게 유지하고 물려줄 것인지 고민한다. 하지만 정작 언젠가 스스로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어려워진다면 누가 나를 대신해 그 결정을 내릴 것인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보지 않는 경우가 많다.
후견은 의사능력을 잃은 뒤에야 비로소 남은 가족들이 고민을 시작하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건강하고 판단력이 충분할 때 자신의 뜻에 따라 미리 준비해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앞으로의 삶을 조금 더 안심하고 맞이할 수 있도록, 노후 준비 목록에 연금과 보험뿐 아니라 ‘후견’에 대한 고민도 한 줄 더해 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