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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국내 한 대형 제조업체 노동조합은 소식지를 통해 노사 합의 없이는 로봇을 생산 현장에 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회사가 로봇 도입 구상을 밝힌 직후였다. 지난 3월 10일 개정 노동조합법이 시행되면서 이 요구를 둘러싼 법적 셈법이 복잡해졌다. 개정법은 노동쟁의 대상에 '근로조건에 영향을 미치는 사업 경영상의 결정'을 넣었다.
그렇다면 이제 노조는 로봇 도입을 막기 위해 파업할 수 있는가. 개정 전이나 지금이나 답은 노조가 무엇을 요구하느냐에 달려 있다. 다만 법 문언이 바뀌면서 어떤 요구까지 정당한 쟁의로 볼지를 두고 해석이 갈리기 시작했다.개정 전: 도입 결정 vs 고용 대책
대법원은 근로자의 노동조건이나 대우에 관한 사항으로서 사용자가 처분할 수 있는 것이면 단체교섭 대상이라고 본다. 로봇 때문에 누가 자리를 옮길지, 재교육은 어떻게 할지, 고용을 몇 년 보장할지가 모두 여기에 들어간다. 이 같은 근로조건에 관한 요구는 쟁의행위의 목적이 될 수 있었다.
도입 결정 자체는 달랐다. 대법원은 구조조정을 할지 말지를 경영 주체의 고도의 경영상 결단으로 봤다. 원칙적으로 교섭 대상이 아니므로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그 시행을 막으려는 파업은 목적이 정당하지 않다.
또 근로조건의 변경이 불가피하더라도 교섭 요구의 실질이 구조조정 자체를 막는 데 있다면 회사의 교섭 거부에 정당한 이유가 있다고 봤다. 로봇 도입에서도 도입 반대와 고용대책 요구는 구별됐고, 중요한 것은 '고용안정'이라는 명칭이 아니라 요구의 실질이었다.개정 후: 로봇 도입 결정도 파업 대상?
개정법은 쟁의 대상에 '결정'이라는 단어를 넣었다. 쟁의 대상이 결정에 따른 근로조건 문제에 그치는지, 결정 자체까지 미치는지를 다시 묻게 하는 변화다. 하지만 고용노동부는 이 조항을 좁게 해석한다. 지난 2월 '개정 노동조합법 해석지침'에 이어 지난 9월 발표한 '경영성과급 등 노동쟁의 대상 시행지침'에서도 신기술 도입 결정 자체와 그에 따른 근로조건 변동을 구별했다.
로봇이나 인공지능(AI)을 도입한다는 사실만으로 의무적 교섭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 다만 인력 운용계획이 수립 중이거나 결정된 사실이 확인되는 등 근로조건의 변동이 객관적으로 예상되면 배치전환과 고용안정 대책 등이 교섭 대상이 될 수 있다. 계획이 확정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기존 인원을 그대로 둔 채 시험용 로봇 한 대를 들이는 경우라면 근로조건에 미치는 영향이 아직 추상적일 수 있다. 반면 특정 공정의 인원을 줄이고 교대제를 바꾸는 자동화 계획이라면 전환 배치 기준과 재교육·고용안정 대책 등을 교섭해야 할 수 있고, 이런 요구는 쟁의행위의 목적이 될 수 있다. 물론 파업이 정당성을 갖추려면 절차와 수단 등 다른 요건도 갖춰야 한다.
더 어려운 문제는 도입 결정과 인원 감축이 하나의 계획으로 묶인 경우다. 고용대책을 실질적으로 논의하려면 도입 시기나 규모까지 조정해야 한다는 요구가 나올 수 있다. 필자는 이 지점에서 개정법 해석을 둘러싼 다툼이 커질 것으로 본다. 근로조건에 관한 요구와 경영상 결정에 대한 개입의 경계는 노동부 지침이 아니라 결국 법원이 정할 일이다.
반면 이런 구체적 사정 없이 '로봇 도입 철회'만 내건 파업은 노동부 해석과 기존 판례에 따르면 목적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어렵다. '고용안정'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만으로 달라지지 않는다.'합의' 한 단어의 무게
그런데 회사의 경영권을 더 크게 제약하는 것은 회사가 스스로 단체협약에 넣은 문구인 경우가 적지 않다. 대법원은 경영권에 속하는 사항이라도 노사가 교섭해 단체협약을 맺었다면 강행법규나 사회질서에 어긋나지 않는 한 효력이 있다고 본다. 정리해고를 제한하기로 약속해 놓고 이를 어긴 해고는 원칙적으로 정당하지 않다.
로봇도 마찬가지다. 임단협 막바지에 "신기술 도입 시 노동조합과 합의한다"는 문구에 서명하는 순간 도입은 회사 혼자 정할 수 없는 일이 된다. 노조가 동의하지 않으면 멈춘다. 밀어붙이면 단체협약 위반이다.회사가 지금 해야 할 일은?회사 입장에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크게 세 가지다.
첫째, 단체협약 문구부터 본다. '노조와 합의한다'고 적으면 노조가 반대하는 한 도입할 수 없고, '노조와 협의한다'고 적으면 의견을 충분히 듣되 최종 결정은 회사가 한다. 협의 대상도 '도입할지 말지'보다 '도입으로 인력에 생기는 변화'로 좁혀 적는다. 이미 합의 조항이 있다면 다음 교섭에서 개정을 검토한다.
둘째, 투자의 필요성과 인력 영향을 구분해 검토하고 기록한다. 왜 로봇이 필요한지, 누구의 업무가 어떻게 바뀌는지, 어떤 대책을 마련할지를 각각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다만 문서를 따로 작성한다고 도입 결정과 인력 감축의 실질적 연결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노사협의회에서는 신기계·기술 도입과 고용 조정의 일반원칙을 협의하고, 재교육 방안이 교육훈련·능력개발 기본계획에 해당하면 의결도 검토해야 한다. 노사협의회 절차가 단체교섭을 대신하지는 않는다.
셋째, 교섭 안건을 회사가 먼저 만든다. 전환 배치 기준, 재교육 계획, 고용유지 방안을 구체적으로 준비해 제안한다. 대책을 내놓았다고 해서 파업의 법적 정당성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다만 도입 찬반으로 맞서던 노사가 전환 배치와 고용대책을 실질적으로 논의할 여지는 커진다.
로봇 도입의 준비는 설비를 고르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누구의 일이 어떻게 바뀌는지 설명하고 그 변화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는 것까지 이어져야 한다. 반대로 단체협약에 '합의'라는 단어를 넣은 회사는 법이 어떻게 해석되든 로봇을 들일 때마다 노조의 동의를 구해야 하는 처지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