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라프손이 설계한 초록빛 E선율의 우주

입력 2026-11-02 12:27
수정 2026-11-02 13:32


클래식 음악이 300년 넘게 사랑받는 건 해석의 여지가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촘촘하게 짜인 악보를 파고들어 새롭게 해석하는 묘미는 수백 년의 시간을 뛰어넘는다. 옛 악보를 답습하는 데 머물지 않고 동시대 음악가들이 저마다 다시 읽고 빚어낼 때, 또 다른 우주가 태어난다.

아이슬란드 출신 피아니스트 비킹구르 올라프손은 클래식 음악이 고루한 답습이 아님을 보여 주는 창조적인 음악가다. 2017년 도이치그라모폰 데뷔 앨범 '필립 글래스'로 클래식계에 신선한 파장을 일으켰고, 이듬해 낸 바흐 앨범으로 남다른 기획력과 큐레이션 능력을 세계에 알렸다. 이후 내놓는 앨범마다 관습을 깨고 자신만의 시각으로 곡을 엮었다. 지난해 발매한 '오푸스 109(Opus 109)'도 마찬가지다. 바흐, 베토벤, 슈베르트를 하나로 묶는 기준은 ‘E조성'이다. 시대와 작곡가는 달라도 곡과 곡이 맞물려 한 편의 드라마처럼 흘러간다.

1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올라프손의 리사이틀은 이 앨범을 실연으로 들을 수 있는 자리였다. 모든 곡을 E장조와 E단조라는 하나의 뿌리로 묶은 80분짜리 기획이었다. 인터미션은 없었다. 곡과 곡 사이 박수 칠 틈을 주지 않고 다섯 곡을 연달아 연주했다. 기존 리사이틀 형식과는 달라 낯설었지만, 그래서 더 흥미로웠다.

○곡과 곡 사이의 경계를 지우다

공연은 E장조에서 출발해 E단조의 곡들을 거쳐 E장조로 돌아오는 구성이었다. 첫 곡은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1권 중 전주곡 9번(E장조). E장조 특유의 밝고 평온한, 서정적인 선율이 흘렀다. 1분 20초 남짓한 짧은 곡이 80분 대서사의 출발점이 됐다.



올라프손은 곡과 곡 사이의 틈을 주지 않고, 유기적 연결을 의도했다. 평온하던 공기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27번(E단조)에서 금세 비극으로 기울었다. 베토벤이 중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던 시기에 쓴 이 곡은 고전 소나타의 틀을 깨고 두 개의 악장만으로 완결된다. 긴장과 비극이 감도는 1악장을 지나면, 2악장에서 그 갈등을 단숨에 풀어 주듯 따뜻한 선율이 펼쳐진다. 올라프손은 페달을 상대적으로 적게 밟아 웅장함을 덜어 내고, 명징하고 투명한 소리를 빚었다.

이어진 곡은 바흐의 파르티타 6번(E단조)이었다. 1731년 출판된 클라비어 연습곡집 1권의 마지막 곡이자, 바흐의 건반 모음곡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다. E단조의 비극적인 정서에 대위법의 정수가 담긴 곡이다. 하프시코드를 염두에 두고 쓴 곡이라 피아노로는 성부를 또렷하게 나누기가 까다롭지만, 올라프손은 정밀한 타건으로 각 성부를 선명하게 살려 냈다. 건반에 고개를 파묻고 연주하는 모습은 글렌 굴드를 떠올리게 했고, 때로는 마법을 부리듯 한 손을 허공에서 자유롭게 움직였다.

다음은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6번(E단조)이었다. 가곡처럼 노래하는 선율에 젊은 슈베르트의 풋풋하면서도 깊은 서정이 묻어났다. 이 곡은 슈베르트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27번을 듣고 화답한 곡이라는 해석도 있다. 두 작곡가 사이의 이야기도 이날 공연의 서사가 된 셈이다.

대미를 장식한 곡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30번(E장조, 작품번호 109). 올라프손의 앨범 제목 '오푸스 109(Opus 109)'도 여기서 따왔다. 짧은 1, 2악장을 지나면 무게중심은 온전히 3악장에 실린다. 고음역의 트릴과 아르페지오가 별빛처럼 쏟아지는 이 악장이 이날 공연의 하이라이트였다. 폭풍 같은 변주가 지나간 뒤 음악은 처음의 주제로 돌아와 고요하게 끝났다. 바흐의 대위법을 품은 이 곡에서, 공연 서두를 장식한 바흐와 마지막의 베토벤이 만났다.



올라프손의 연주는 독특한 기획만큼 표현도 그만의 방식이었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여도 들여다보면 파격이 가득했다. 고전 레퍼토리도 그만의 리듬감을 더해 다른 장르처럼 들리게했다.

이날 무대를 관통한 또 하나의 키워드는 색이었다. “E조성에서 초록빛을 느낀다”고 말해 온 그는 초록색 벨벳 재킷을 입고 등장했다. 연주도 그 말에 어울렸다. 감정을 과장하지도, 지나치게 차갑지도 않은 투명하고 담담한 소리였다. 지구가 아니라 우주의 어느 행성 같다는 아이슬란드의 낯설고 아름다운 자연이 이런 색일까. 그의 독특한 타건과 해석은 초록빛을 넘어 아이슬란드의 풍경까지 상상하게 했다.

○'인텐스'했던 80분, 뜨거웠던 객석



명곡을 차례로 듣는 데 익숙한 청중에게는 낯설고 어려운 80분이었을 것이다. 친절한 안내 없이 연주자가 설계한 세계에 곧장 던져진 느낌이었다. 하지만 프로그램 자체로 예상치 못한 지적인 자극이 가득했고, 객석의 반응은 뜨거웠다.

앙코르에서는 틀에 얽매이지 않는 그의 매력이 마음껏 드러났다. 평소 관객과 소통을 즐기는 연주자답게, 그는 이날 프로그램이 "인터미션도 없고 꽤 인텐스(intense)"했다며 끝까지 집중해 준 객석에 박수를 보냈다. 첫 곡으로는 자신을 도이치그라모폰의 간판스타로 만든 앨범 '필립 글래스'에서 에튀드 6번을 골랐다. 물결치는 아르페지오 위로 재즈 공연을 떠올리게 할 만큼 리드미컬한 연주가 쏟아졌다. 이어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를 그만의 편곡으로 들려줬고, 프랑스 작곡가 라모의 두 곡으로 무대를 마무리했다.

조민선 기자 sw75j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