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서 중요한 건 가격보다 레퍼런스…고객관리가 시작이자 끝" [이광식의 거상열전]

입력 2026-10-31 14:00
수정 2026-10-31 14:02


“미국 시장에 진출할 때 가장 먼저 확보해야 할 것은 법인도, 사무실도 아닙니다. 당장 매출을 만들어줄 고객입니다.”

미국 조지아주에서 20년 넘게 해충방제업체 ‘벌레박사’를 운영해온 썬 박 월드옥타 글로벌스타트업위원장은 미국 진출을 준비하는 한국 기업에 이렇게 조언했다. 그는 “미국 법인은 하루 만에도 만들 수 있지만, 고객은 그렇게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며 “인터넷으로 미국 시장 사업계획서를 만드는 데 그치지 말고 직접 현지에 와서 운동화 끈을 묶고 시장을 돌아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위원장도 미국에 오기 전에는 비슷한 착각을 했다. 사람들이 느리게 걷고, 행정이나 서비스도 답답할 정도로 느린 미국을 보며 “한국 사람처럼 빠릿빠릿하게만 하면 성공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가족과 함께 이민 가방을 끌고 정착하고 보니 영어도, 사업 방식도, 사회 규칙도 완전히 달랐다. 그는 “한국에서 통했던 방식과 습관을 내려놓고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했다”고 말했다.

그가 미국 시장에서 가장 중요하게 꼽은 것은 ‘레퍼런스’다. 한국에서는 가격 경쟁력이 거래 성사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미국에서는 이미 검증된 기업인지가 훨씬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박 위원장은 “첫 고객 한 명을 만드는 데 가장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한다”며 “그 고객이 만족하면 두 번째, 세 번째 고객을 만드는 것은 훨씬 쉬워진다”고 말했다. 미국 시장은 생각보다 보수적이어서 검증된 업체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고객관리는 계약 이후가 더 중요하다고 했다. 박 위원장은 “고객이 만족하면 주변 회사와 지인에게 적극적으로 소개한다”며 “고객 한 명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특히 최근에는 인터넷 리뷰가 기업 평판과 매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만큼 제품을 한 번 판매하는 것보다 신뢰를 지속적으로 쌓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고객관리야말로 사업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했다.

제품 경쟁력만 믿고 미국 시장에 뛰어드는 것도 경계했다. 미국의 대형 전시회에 가면 같은 분야의 경쟁기업이 줄지어 서 있고, 바이어가 가장 먼저 묻는 질문은 “왜 당신 회사 제품을 사야 하느냐”는 것이다. 박 위원장은 “제품이 유니크하고 가장 좋다는 자기만의 시장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제품 인증과 규격, 포장, 설명서의 현지화가 제대로 돼 있지 않으면 바이어가 먼저 손을 내밀지 않고, 제품 사양만 나열한 브로슈어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설명이다. 브랜드 스토리까지 갖춰야 미국 소비자와 바이어를 설득할 수 있다고 했다.

비용에 대한 눈높이도 다시 맞춰야 한다. 인건비와 복지 비용은 과소평가하기 쉽다. 좋은 인재를 뽑으려면 급여뿐 아니라 401K 은퇴연금과 의료보험 등 복지조건도 경쟁사보다 나은 수준으로 갖춰야 한다. 법률비용도 만만치 않다. 미국은 노동법이 주마다 다르고 채용과 고용, 해고 과정에서 소송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어 민감한 문제에는 법률 고문이 필요하다. 박 위원장은 “문구 하나까지 신중하게 봐야 할 만큼 한국과 고용 환경이 다르다”고 했다.

현지 첫 직원도 신중하게 뽑아야 한다. 박 위원장은 영어만 잘하는 사람보다 미국과 한국의 문화를 모두 이해하고 본사와 원활히 소통할 수 있는 인력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미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이 이민 1.5세나 2세를 선호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그는 “첫 직원은 영어와 네트워크를 갖추면서 한국 본사와도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박 위원장은 미국 내 입지도 업종별로 달리 접근해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제조·물류기업은 조지아·앨라배마·텍사스 등 남동부 지역, 정보기술(IT)·서비스 기업은 캘리포니아·뉴욕·텍사스 오스틴, 바이오는 보스턴, 스타트업은 실리콘밸리와 시애틀 등 각 지역의 산업 생태계를 먼저 봐야 한다는 게 그의 조언이다. 단순히 세금 혜택이 큰 주를 찾기보다 “내 고객과 필요한 인프라가 어디에 있는지”를 먼저 확인해야 한다고 했다.

특히 박 위원장이 사업 기반을 둔 조지아는 현대자동차를 비롯한 한국 제조기업의 투자가 늘면서 중소기업과 스타트업에도 새로운 기회가 생기고 있다고 했다. 대기업 공장 하나가 들어오면 부품과 금형, 물류, 설비 보전, IT 서비스는 물론 식음료와 주거 서비스까지 주변 생태계가 만들어진다. 그는 “바로 그 틈이 중소기업과 스타트업의 자리”라고 말했다. 조지아텍과 에모리대 등 지역 대학도 산학연 프로그램을 확대하며 스타트업 육성에 적극 나서고 있다.

미국에서 성공한 한국 기업의 공통점은 결국 고객의 목소리를 잘 듣는 데 있다고 했다. 불만이나 부정적인 리뷰라도 피하지 않고 CEO와 주요 경영진이 직접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 위원장은 “고객의 거친 반응 속에도 값진 경영 지침이 들어 있다”며 “고객을 무시하는 회사는 미국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미국 시장 진출을 겁낼 필요는 없다고 했다. 준비만 제대로 됐다면 미국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큰 기회의 시장이라는 게 그의 판단이다. 다만 ‘큰 시장이니 일단 가보자’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고객이 있는지, 제품이 미국 기준에 맞는지, 현지 인력을 감당할 수 있는지, 법률·보험·마케팅 비용까지 버틸 자금이 있는지를 먼저 따져야 한다.

박 위원장은 “준비된 기업은 모두 환영한다”고 했다. 다만 그가 말하는 준비란 법인을 설립하고 사무실을 얻는 것이 아니다. 실제 고객을 만들고, 그 고객을 끝까지 관리하며, 그 과정에서 레퍼런스를 하나씩 쌓아가는 것이다. 그는 “미국에서는 가격보다 레퍼런스가 훨씬 강해, 첫 고객이 만족하면 그 다음 길이 열린다”고 말했다.

이광식 기자 bumer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