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 서대문구 신촌 빨간 잠망경 앞에서 200명 이상의 사람들이 한데 모여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고, 사진을 찍다 20분 만에 해산했다. 이들이 축하한 건 일본 애니메이션 '나루토'의 주인공 나루토의 생일. 팬들은 입장료나 참가비도 없이 자발적으로 모여 캐릭터의 생일을 기념했다.
작품 속 닌자 승급 시험을 직접 체험해볼 수 있도록 기획한 '중급닌자시험'은 1000명 이상의 신청자가 모여 경쟁률이 20대 1을 웃돌았다. 두 행사 모두 애니메이션 제작사나 지식재산권(IP) 기업이 아닌, 팬들이 직접 기획했다.
국내 애니메이션 팬덤의 소비 방식이 달라지고 있다. 작품을 보고 굿즈를 사는 데서 나아가 팬들이 직접 행사를 기획하고 콘텐츠를 현실에서 재현하는 '참여형 팬덤'이 형성되고 있다. 콘텐츠 업계는 한국을 애니메이션 소비가 적극적인 시장으로 평가하고 있다. 해외 콘텐츠 기업 또한 한국 소비자의 반응을 검토하면서, 한국이 콘텐츠 해외 시장성을 가늠하는 '테스트베드'가 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굿즈 넘어 현실로…팬들이 직접 만드는 애니 콘텐츠
국내 소비자들은 일본 콘텐츠를 일상적으로 소비하고 있다. 시장조사전문기업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지난 5월 국내 만 19~59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26 일본 제품 및 콘텐츠 소비 관련 인식 조사'에 따르면, 최근 1년 내 일본 콘텐츠를 이용한 경험이 있는 응답자는 전체의 64.3%였다. 특히 20대는 81.6%로 높았다. 일본 콘텐츠 이용 경험자 가운데 애니메이션·만화·웹툰을 이용했다는 응답은 73.3%로 가장 많았다. 전체 응답자의 52.6%는 일본 문화가 일상적인 소비문화 중 하나가 됐다고 답했다.
20대의 경우 일본 캐릭터 IP 굿즈를 구매한 경험이 가장 많았다. 20대 응답자의 40.7%가 1년 이내 피규어 등 일본 캐릭터 굿즈를 구매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일상적인 외식뿐만 아니라 캐릭터 IP 산업 등 다방면에서 일본 라이프스타일을 소비하는 특징을 보였다.
일본 콘텐츠를 즐기는 팬들 사이에서는 작품을 현실에서 경험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애니메이션 '나루토' 관련 행사를 기획하는 '대한닌자달리기협회'가 대표적이다. 지난해 11월 결성된 이 모임은 팬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비공식 단체로, 생일파티와 합창, 달리기 행사 등을 열고 있다. 협회에 따르면 주요 참여 연령대는 20대부터 30대 중반이다. 사전 신청을 받는 행사는 평균 5~6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오는 11월 열리는 중급닌자시험 안내 게시물은 조회 수 150만회를 넘겼다.
협회를 운영하는 우소정 씨는 팬덤 문화의 변화를 체감한다고 말했다. 우씨는 "과거에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일부 마니아층의 문화로 여겨졌다면, 최근에는 대중문화의 한 영역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며 "팬덤 소비 방식도 작품 감상과 굿즈 수집을 넘어 좋아하는 작품을 매개로 경험하고, 함께 추억을 쌓는 방향으로 넓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팬들이 단순한 관객이나 소비자가 아니라 직접 세계관의 일원이 돼 참여할 수 있는 행사를 기획하고 있다"고 덧붙였다.한국서 통하면 세계서도 통한다…글로벌 업계의 시선
국내 애니메이션 팬덤 소비는 2차 창작 시장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팬들이 서로 일러스트 등 콘텐츠 제작을 의뢰하는 '커미션'이 대표적이다. 서브컬처 커미션 중개 플랫폼 '크레페'는 지난해 연간 거래액 436억원, 거래량 174만건을 기록했다. 해외 이용자와의 거래액도 25억원에 달했다. 모바일 앱은 출시 직후 애플 앱스토어 전체 무료 앱 다운로드 순위 1위에 올랐다. 팬들이 콘텐츠를 소비하고 경험하는 것에서 나아가 직접 창작을 의뢰하고 거래하는 시장까지 형성된 것이다.
국내 애니메이션 팬덤의 특징은 수용성에 있다. 이성민 한국방송통신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는 "한국은 일본식 만화 문법에 익숙한 소비층이 세대적으로 축적된 시장"이라며 "웹툰 또한 일본식 만화 양식에 익숙한 작가들이 포진돼 있어 상대적으로 다른 국가보다 일본 만화에 대한 대중적인 저변이 넓은 편"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에서 콘텐츠 확장성의 가능성을 판별할 수 있는 이유다.
국내 팬덤의 특징은 글로벌 콘텐츠 기업이 한국 시장을 주목하는 배경 중 하나로 꼽힌다. 글로벌 애니메이션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크런치롤은 지난 10월부터 한국 서비스를 시작했다. 크런치롤은 미국 소니 픽처스 엔터테인먼트와 일본 애니플렉스의 합작회사다.
크런치롤 관계자는 한국을 핵심 전략 국가로 꼽으며 "내수 시장은 작지만 굿즈 소비에 거부감이 없고, 콘텐츠 소비자의 반응이 해외 성공 여부를 가늠할 수 있을 만큼 지표가 된다"며 "한국 넷플릭스 콘텐츠가 흥하면 전 세계적으로 통하는 것이 예시"라고 말했다.
팬덤의 '설렘'은 단순 '덕질' 소비를 넘어서 실질적인 경제 지표를 움직이는 '덕질 경제'로 자리 잡았습니다. K-컬처를 매개로 발생하는 모든 현상을 총망라해 대중의 열광이 어떻게 '설레는 소비'로 치환되는지 그 이면의 수익 구조와 비즈니스 모델을 날카롭게 포착하고자 합니다.
박수빈 한경닷컴 기자 waterbe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