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초 미국의 한 호텔에서 삼성그룹 부회장 이건희는 비서실의 손병두와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러다 평소 말수가 적었던 그가 뜻밖의 속내를 털어놓았습니다. “내가 얼마나 참고 있는지 세상 사람들은 모를 것.” 훗날 삼성의 운명을 바꾼 경영자가 아직 자신의 뜻대로 회사를 바꾸지 못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이건희는 1979년 부회장이 됐지만 자신이 구상한 일을 마음껏 펼칠 처지는 아니었습니다. 의욕적으로 추진한 유공 인수는 1980년 선경에 밀려 무산됐습니다. 새로운 사람을 쓰고 사업의 방향을 바꾸려 해도 기존 조직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이병철 회장의 그늘도 여전했습니다. 삼성의 후계자라는 이름은 있었지만 그 이름만으로 되는 일은 많지 않았습니다.
1987년 회장이 되고서도 사정은 금세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조직은 여전히 그가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따라오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1993년 그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신경영을 선언합니다. 흔히 이 선언을 어느 날 갑자기 터져 나온 일갈(一喝)로 기억하지만 그 밑에는 오래 쌓인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떠올린 것은 10월 27일 경희대·한경비즈니스 인사이트 포럼에서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의 강연을 들으면서였습니다. 세계시장과 인공지능(AI), 금융의 미래를 거침없이 이야기하던 박 회장이 어느 순간 자신의 지난 시간을 돌아봤습니다.
“글로벌 인수합병(M&A)을 하려고 오랜 시간을 기다렸어요.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M&A에는 캐피털이 있어야 할 거 아니에요. 캐시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10년을 기다렸어요.”
인수하고 싶은 해외 기업은 있는데 살 돈이 없었습니다. 그는 그 시절을 굉장히 어려운 시간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해외 M&A를 시작하면서 얼굴이 좋아졌다고 했습니다. 15년 전보다 지금 자신의 얼굴이 훨씬 좋아 보이지 않느냐고도 했습니다. 청중에게 웃음을 건네는 말이었지만 그 웃음 속에 긴 세월이 들어 있었습니다.
미래에셋은 캐나다와 미국, 호주, 일본으로 금융 영토를 넓혀 가는 중입니다. 박 회장은 지금도 인수해야 할 기업이 많아 개인적으로 배당을 받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기다림이 끝났다고 멈춘 것이 아니라 다음 기회를 위해 다시 자본을 쌓고 있는 셈입니다.
두 사람의 처지는 다른 듯 같습니다. 이건희는 후계자였고 박현주는 창업자였습니다. 물론 밖에서 보면 두 사람은 이미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부러움의 대상이었고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의 마음속에는 아직 이루지 못한 더 큰 꿈이 있었습니다. 미래가 보이는데 그곳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은 어쩌면 실패보다 더 괴로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생각해보면 기다리는 동안에는 그들도 끝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건희는 언제쯤 회사를 뜻대로 바꿀 수 있을지 몰랐고, 박 회장도 10년이 지나야 기회가 올 줄은 몰랐을 겁니다. 참고 견딘 시간이 먼저 있었고 성공은 그 뒤에 왔습니다. 박 회장이 얼굴이 좋아졌다며 웃을 수 있는 것도 그 시간을 지나왔기 때문입니다. 그 기다림을 알고 나니 그들의 성공도 달리 보입니다.
그런데 기다리고 참고 견디는 것은 위대한 경영자들만의 일이 아닙니다. 가족을 위해 자신이 하고 싶던 일을 미루는 사람, 더 나은 내일을 바라며 힘든 사회생활을 견디는 사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고민을 품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도 같은 시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부분은 그렇게 조용히 고뇌하며 무언가를 꾹꾹 참아내고 있습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결과 정도입니다. 두 사람처럼 사회적 성공에 이르는 사람은 극히 일부니까요. 대부분에게는 프랑크푸르트 선언도, 대형 M&A도 없을 것입니다. 오랜 인내가 끝내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견뎌온 시간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인내는 그것만으로도 존중받을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인생을 스토리로 이해하지만 그들이 견뎌온 시간까지 볼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 곁에서 아무 말 없이 웃고 있는 사람도 자신만의 길고 긴 기다림을 지나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 기다림의 끝이 어떻든, 그 시간을 견디고 있는 모든 사람을 응원합니다.
당신도, 그리고 나도.
이홍표 기자 hawll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