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의 석양 아래 엮어낸 은실의 호흡… 조성진과 빈 필의 밤

입력 2026-10-26 10:31
수정 2026-10-26 10:46
황혼이 아름다운 일요일이었다. 구름 사이로 타오르는 듯한 서쪽 하늘을 여러 사람이 찍어 SNS에 올렸다. 26일 서울의 일몰은 오후 5시 41분이었다.

이날 투간 소키에프 지휘와 조성진의 협연으로 열린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내한 공연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감상한 청중들은 중간 휴식 시간에 서쪽 국립국악원 쪽 하늘로 사라져가는 붉은 빛을 음미할 수 있었다. 이 공연 후반부에 연주된 브람스 교향곡 2번에 대해 같은 시대 음악평론가 헤르만 크레치마는 ‘저물어가는 태양의 숭고하고 맑은 빛’을 표현한 것이라고 적었다.



1부 연주곡인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을 조성진은 2023년 11월 같은 장소에서 키릴 페트렌코 지휘 베를린 필과 협연한 바 있다. 그는 이외에도 이 곡을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런던 필, 뉴욕필 등과 협연해 왔다. 그의 머리에서 심장과 손끝으로 연결된 협주곡 중 하나라고도 할 수 있다.

이 곡의 상징과도 같은 시작 부분 피아노 솔로가 울려나오는 순간 나도 모르게 엇, 하고 피아노 쪽으로 고개가 더 돌아갔다. 수없이 들어온 작품이지만 이 순간 잠시 피아니스트 혼자 앉은 독주회에 초대된 듯했다. 명료함과 노래, 리듬이 블랙과 금색의 조화처럼 살짝 뿌리는 옅은 빛. 단 다섯 마디에 연주자는 어떤 손가락과 발끝의 마법을 입힌 걸까. 한순간 다른 공기가 조성진만을 감쌌다. 그것이 이날 성공의 시작이었다. 그 인상이 전반부 전체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오케스트라의 응답에 이어 메인 섹션의 첫 주제가 안락한 리듬을 타고 흘렀다. 조성진의 스타카토는 또랑또랑했고 레가토는 반짝 윤기를 뿌리며 유연하게 흘렀다. 푸르릉거리는 아르페지오
악구들이 정밀하기 그지 없게 펼쳐졌고 이 모든 요소에 과장이 느껴지지 않았다.

특유의 침착한 표정으로 연주자는 ‘처음부터 이렇게 마련된 것이다’라는 듯 모든 흐름을 연결해 갔다. 제1주제 후반부에서 오른손이 물결 같은 노래를 펼치는 동안 왼손은 큰 시간구조 단위에서 리듬을 확인시키며 유장한 프레이즈를 형성했다. 이런 인상 역시 1부 내내 곡을 지배했다.
소키예프와 조성진은 서로를 눈에 띄게 살피면서, 실제로 자주 쳐다보며 합을 맞춰나갔다. 일정의 한계 때문에 처음부터 완성된 호흡이 아닌 것은 분명했지만, 오히려 무대 위에서 섬세하게 조율하는 과정이 명확히 느껴져 훨씬 커다란 재미를 안겼다.

2악장은 알려졌다시피 ‘현명하고 사색적인 피아노가 사나운 현악 유니슨을 길들이는’ 부분이다. 조성진의 솔로는 색온도를 맞춘 듯이 이 서사에 어우러졌다. 현자가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상대의 항변을 가라앉히는 듯했다.

마지막 3악장에서 조성진은 구슬 구르듯한 매끄러움만이 피아니스트의 최종 목적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알이 고른 유려한 터치를 자랑하는 데 그치는 수많은 연주와 달리, 그는 중간중간 유머 속에 숨은 미시적인 사색을 끌어올렸다. 강한 터치가 필요한 부분에서는 마치 의자에서 튀어오를 듯 체중을 이용했다.



열렬한 갈채와 함께 이어진 앙코르에서 조성진은 쇼팽의 왈츠 두 곡으로 거대 홀 내의 공기를 완전히 바꾸었다. 마주르카를 연상시키는 우아하고 내성적인 왈츠 A단조, 그리고 ‘강아지 왈츠’로 알려진 왈츠 D플랫장조다. 본 무대에 없던 과감한 강약 대비와 루바토, 한층 더 날아오르는 듯 푸르릉거리는 알이 고른 터치가 완전히 다른 콘서트를 마주한 느낌이었다.

2부 연주곡은 앞서 언급한 브람스 교향곡 2번이었다. 한국 무대와 유난히 인연이 깊은 소키예프는 주빈 메타의 건강 이상으로 2009년 긴급 투입된 빈 필 서울 공연에서 브람스 교향곡 4번을, 2023년 프란츠 벨저뫼스트 대신 지휘한 빈 필 공연에서 브람스 교향곡 1번을 지휘한 바 있다. 3번 교향곡까지 연주하게 된다면 그랜드 슬램이 완성되는 셈이다.



1부에서도 느낀 바이지만 이날 빈 필의 목관 음량은 유난히 작게 들렸다. 지휘자도 현악을 적절히 누르면서 필요한 부분에서 목관이 또렷이 들리도록 격려하는 점이 눈에 띄었다. 사람의 필적이 그렇듯이 지휘자의 동작도 각자의 뚜렷한 개성이 있으며 때로는 이런 외관이 내용을 지배한다. 때로 바퀴(휠)을 돌리는 듯한 소키예프의 우아한 비팅은 누구와도 닮지 않았다.

2부 내내 지난해 빈 필과 내한한 크리스티안 틸레만의 브람스 교향곡 4번이 머리에 함께 떠올랐다. 약간 과감히 요약하자면 틸레만의 빈필은 완벽히 설계된 황금색 화면, 소키예프의 빈필은 순간마다의 호흡에 더 눈길이 가는 은실(銀絲) 직조물 같은 인상이 강했다. 지휘자는 빈필 특유의 밀도높은 앙상블이 지나치게 번쩍거리거나 튀어나오지 않게 중간중간 우아한 포즈로 흥분을 가라앉혔다. 오른쪽으로 앉은 비올라 파트의 견고한 안쪽 성부가 안정된 리듬과 함께 커다란 신뢰감으로 다가왔다.

지난해 만난 빈 필은 모든 소리의 층(레이어)을 하나의 덩어리로 밀어 올렸다. 올해의 빈 필은 층 위에 층을 쌓아나가면서 그 쌓임이 자아내는 반짝임을 즐기는 것처럼 들렸다. 틸레만의 빈 필이 빈 무지크페라인 특유의 휘황한 음향을 이국의 공간에서 비슷하게 구현하려 했다면, 소키예프의 빈 필은 원래 악단 합주의 밸런스가 다른 공간에서 지어내는 새 음향적 균형 그대로를 즐기는 듯했다.



악단의 앙코르는 세 곡, 요제프 슈트라우스의 ‘착란(Delirien) 왈츠’, ‘익살(Jocus)’ 폴카, 그리고 요한 슈트라우스의 ‘헝가리 만세!’ 폴카였다. 소키예프는 ‘그다지도 열광하시니 어쩔 수 없이 하나 더 드립니다’라는 듯한 유머러스한 포즈로 분위기를 띄웠다. 착란 왈츠와 헝가리 만세 폴카는 슈트라우스 가족의 붕 뜬 듯한 빈 특유의 분위기와 또다른 표현주의적, 이국적 분위기를 각각 전해주어 한결 이색적이었다.

알려졌다시피 소키예프는 2027 빈 신년음악회를 지휘할 예정이다. 어쩌면 이날 청중들은 매년 열리는 그 이벤트를 몇 분의 1 정도 무료로 선사받은 것일지도 모른다. 청중들은 해외 악단의 내한을 넘어 빈 필 내한으로서도 눈에 띄는 함성과 열광으로 응답했다.



사족을 보태자면 그 자리에 함께한 나 자신을 비롯해 2500명의 청중을 칭찬하고 싶다. 늦가을의 입구인데도 이날 객석은 가끔 바스락 소리 정도를 제외하면 마른기침 하나 들리지 않게 고요했다.

시월 말의 밤거리는 생각보다 훈훈했다. 베토벤의 협주곡과 쇼팽의 왈츠, 브람스의 교향곡과 슈트라우스 가족의 춤곡이 거대한 곡의 네 악장처럼 긴 여운을 남긴 저녁이었다.

유윤종 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