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11월 미국 시애틀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는 세계화 반대 시위로 아수라장이 됐다. 검은 옷에 복면을 쓴 시위대가 경찰과 충돌하고 도심의 상점 유리창을 깼다. 세계에 이름을 알린 ‘블랙 블록(Black Bloc)’의 등장이다.
뿌리는 1980년대 서독의 무정부주의·급진 좌파 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도심 빈집을 점거한 활동가들은 경찰의 강제 철거에 맞서 거리로 나왔다. 검은 옷으로 맞춰 입은 대열이라는 뜻에서 블랙 블록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념적으로 무정부주의, 반자본주의, 반파시즘과 연관된 이들은 경찰과 충돌해 국가권력의 폭력성을 드러내려고 한다. 강경 진압이 체제의 정당성을 무너뜨릴 것이라는 계산이다. 프랑스에서는 2016년 노동법 개정 반대 시위에 처음 등장했다. 이후 2018년 유류세 인상에 반발해 시작된 ‘노란 조끼’ 시위에서 강경 진압을 겪은 일부가 블랙 블록의 전술을 받아들이며 세력을 확장했다.
지난 17일 프랑스의 대규모 시위에서 그 양상이 더 과격해졌다. 교육예산 삭감과 생활비 급등에 항의하기 위해 약 50만 명이 거리로 나선 가운데 검은 옷의 무리가 투석과 방화를 하고 약탈까지 벌이며 도심 곳곳이 전쟁터로 변했다. 리모주에서는 143년 된 시청사가 화염병과 폭죽 공격으로 지붕과 시계탑이 무너졌다. 파리에서는 은행 사무실이 불타고 상점 수백 곳이 털렸다.
프랑스 정부는 블랙 블록을 ‘팍시외(factieux·전복 세력)’로 규정하고 검거에 나섰지만 쉽지 않다. 블랙 블록에는 지도자도, 중앙조직도 없다. 소셜미디어와 메신저로 행동방식을 공유하고 현장에서는 역할을 나눠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한 프랑스 안보전문가는 이들을 “악보를 너무 잘 알아 지휘자가 필요 없는 오케스트라”에 비유했다.
지도자가 없으니 체포할 수뇌부도, 해산시킬 중앙 조직도 없다. 프랑스가 마주한 것은 거리의 폭력뿐만이 아니다. 기존 치안 체계로는 대응하기 어려운 새로운 형태의 반정부 행동이다. 국가 권력에 저항하겠다던 블랙 블록이 이제 국가의 통제 능력 자체를 시험하고 있다.
이심기 수석논설위원 s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