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英 미술 축제의 초대장…전 세계 눈을 훔치다

입력 2026-10-22 17:33
수정 2026-10-23 01:56

21일 오전 9시50분(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그랑팔레 앞은 세계에서 몰려든 '슈퍼리치'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10분 뒤 개막하는 미술 장터인 아트바젤 파리에 조금이라도 일찍 들어가 작품을 먼저 '찜'하려는 미술품 컬렉터들이었다. 이들은 행사장 지도를 펼쳐 들고 어느 갤러리부터 들를지 진지하게 의견을 나눴다. 불과 며칠 전 파리 시내 곳곳이 대규모 시위로 난장판이 된 것과 대조적인 풍경이었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위해 지어진 그랑팔레는 45m에 달하는 층고와 1만3500㎡의 넓이를 자랑하는 광활한 전시장이다. 41개국에서 온 211개 갤러리가 이곳에 부스를 차렸다. 반투명 유리 천장을 통해 자연광이 명작들 위로 쏟아지자 큰손들의 지갑은 활짝 열렸다. 곳곳에서 수십억원대 거래가 체결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이날 전시장에서 만난 함윤철 제이슨함 대표는 “파리가 기존 강자인 영국 런던, 스위스 바젤을 넘어 유럽 최고 미술시장으로 거듭나고 있다”고 말했다.파리, 하루 만에 런던 제쳐
개막일과 전날 사전 판매만 합쳐도 판매 실적은 1000억원을 가뿐히 넘어섰다. 하우저앤워스는 독일 회화 거장 게르하르트 리히터와 게오르크 바젤리츠의 1965년작을 각각 약 1000만달러(약 132억원)에 팔았고, 화이트큐브는 줄리 머레투의 회화 두 점을 785만달러(약 104억원)씩에 판매했다. 데이비드 즈워너는 리히터의 또 다른 회화를 850만달러(약 113억원)에 팔았다.

미술관에서나 볼 수 있는 거장들의 작품도 이곳 전시장에서 흔히 만날 수 있었다. 타데우스 로팍은 첫날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 네 점(가격 미공개)을 팔았다. 정희재 타데우스 로팍 팀장은 “각 화랑이 보유한 가장 좋은 작품들을 들고나온 것 같다”며 “첫날부터 고가 작품들이 판매되고 있다”고 말했다.

행사장 최고가 작품은 페이스 디도나 슈래더가 내놓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의 1917년작 누드. 호가는 1억달러(약 1324억원)에 달한다. 리처드 내기 갤러리는 에곤 실레와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을 들고나왔다. 에드가 드가, 폴 세잔의 작품도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공교롭게도 둘 다 생전 그랑팔레 전시 이력이 있는 작가들이다.

1주일 전 런던에서 열린 경쟁 아트페어인 프리즈 런던과 비교하면 판의 크기부터 달랐다. 같은 갤러리들이 프리즈 런던 첫날 판 작품 중 가장 비싼 건 화이트큐브의 가브리엘 오로스코 작품(약 4억원), 로팍의 앤터니 곰리 조각(약 9억원), 하우저앤워스의 에이버리 싱어 신작(약 10억6000만원)이었다. 최고가가 많게는 20배 넘게 차이 났다. 프리즈 런던을 통틀어 최고가 작품(공개 기준)도 얀 브뤼헐의 17세기 정물화가 기록한 500만파운드(약 90억원)였다.4년 전부터 급격히 바뀐 미술 판도
그동안 세계 미술시장의 큰손들이 가장 선호하는 미술 장터는 프리즈 런던이나 스위스에서 열리는 아트바젤 인 바젤이었다. 하지만 4년 전 파리에서 아트바젤 파리가 열리기 시작한 뒤 판도가 급격히 바뀌었다. 마크 글림처 페이스 대표는 “이제 런던 미술시장보다 파리 분위기가 더 활기차다”고 말했다.

유럽 미술시장을 선도하던 런던이 파리에 추월당한 건 세금 문제가 컸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이후 영국과 유럽연합(EU) 사이에는 미술품이 오갈 때마다 수입 부가가치세와 통관 절차가 따라붙었다. 크리스티가 런던에서 열던 ‘이탈리아 미술 경매’를 2022년 파리로 옮긴 것도 이 때문이다. 런던 미술시장 관계자는 “지난해 4월 영국이 외국인 부자에 대한 세제 혜택을 없애면서 중동과 남아시아 부호들이 런던을 떠난 영향도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 파리가 가진 세계 최고의 문화적 자산이 더해졌다. 1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광활한 그랑팔레에서 열리는 아트바젤 파리는 런던의 공원 천막에 꾸린 프리즈 런던과 분위기부터 달랐다. 맞은편 프티팔레와 인근의 오랑주리·오르세미술관은 그 자체로 미술의 보고다. 이날 오랑주리·오르세미술관 앞에는 아트바젤을 전후해 전시를 보려는 관람객이 몰려 입장까지 한 시간 넘게 기다려야 할 만큼 긴 줄이 늘어섰다.반격 노리는 런던, 전시장은 ‘바글’
그 대신 프리즈 런던은 외연을 넓히는 전략을 택했다. 프리즈 런던은 올해 행사에서 토요일 오전 VIP만 입장할 수 있는 전용 시간을 추가로 한 시간 열었다. 대부분의 구매가 VIP 전용 시간에 이뤄진다는 점을 감안한 것이다. 출품작 가격대는 평년보다 낮았고, 난해한 추상회화나 거대한 설치작품 대신 보기 좋은 구상회화가 많았다. 이학준 크리스티코리아 대표는 “갤러리들이 ‘팔릴 만한 작품’을 들고와서인지 판매 분위기는 괜찮은 편이었다”고 말했다.

새로운 손님도 늘었다. 행사장 곳곳에서는 중동계·인도계 갤러리 및 관람객이 흔히 눈에 띄었다. 프리즈 관계자는 “인도·중국 관람객이 지난해의 두 배 넘게 증가했다”며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에서 온 왕족이 작품 세 점을 사는 등 걸프 지역과 인도 컬렉터의 구매도 많았다”고 전했다.

일반 관람객도 증가세를 보였다. 프리즈 런던을 찾은 관람객은 9만5000명으로 지난해보다 5000명 늘었다. 그래서인지 17일 찾은 런던 리젠트파크 행사장은 사람들로 붐벼서 제대로 이동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미술계에서는 초고가 작품은 아트바젤 파리에서, 중가 작품은 프리즈 런던에서 거래하는 ‘역할 분담’이 굳어지고 있다고 본다. 마크 파요 하우저앤워스 대표는 “프리즈 런던에서 아트바젤 파리로 이어지는 2주간을 하나의 큰 ‘판매 시즌’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갤러리 중 프리즈 런던과 아트바젤 파리에 모두 참여한 곳은 국제갤러리가 유일했다. 프리즈 런던에서는 갤러리바톤, 파운드리서울, 지갤러리 등의 부스가 주목받았다. P21은 신진 화랑들을 조명하는 섹션 ‘이머전스’에 한국 화랑 최초로 뽑혀 국제갤러리와 함께 아트바젤 파리에 참가했다. 미술계 관계자는 “해외 페어에 참여하는 한국 화랑이 줄어드는 추세”라며 “국내 미술시장의 불황이 반영된 현상”이라고 말했다.

런던·파리=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