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의 카덴차(독주 부분)를 직접 쓰고, 하이페츠의 바이올린을 들고도 그의 연주를 흉내 내지 않는다. 불꽃처럼 화려한 음색과 강렬한 리듬으로 청중을 휘어잡으면서도 한 음을 짙게 붙잡을 줄 아는 연주자. 2021년 예후디 메뉴인 바이올린 콩쿠르 우승자이자 도이체그라모폰(DG) 전속 아티스트, 마리아 두에냐스(24)를 한국경제 아르떼가 최근 만났다.
스페인 그라나다에서 태어난 두에냐스는 오늘날 가장 유망한 바이올리니스트를 꼽을 때 빠지지 않고 거론된다. 19세이던 2021년 예후디 메뉴인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에서 청중상과 함께 우승을 차지했고, 같은 해 빅토르 트레티야코프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빈필하모닉, 파리오케스트라, LA필하모닉 등 정상급 악단과도 협연했다. ‘될성부른 떡잎’의 등장에 DG는 2022년 그에게 전속 계약을 제안했다.
DG에서 낸 앨범은 잇달아 성과를 거뒀다. 2023년 데뷔 음반에서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실황을 녹음하고, 직접 쓴 카덴차를 수록해 창작자의 면모를 드러낸 그는 2024년 오푸스 클라시크에서 ‘올해의 젊은 예술가상’을 받았다. 이어 파가니니의 ‘24개의 카프리스’를 소화한 앨범으로 그라모폰 클래식 음악상을 거머쥐었다. 뉴욕필하모닉 음악감독인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과 함께한 앨범부터 룩셈부르크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내한 공연까지 거침없는 행보를 이어왔다.하이페츠의 음악과 마주한 까닭두에냐스가 발매한 앨범 ‘오마주 투 하이페츠(Homage to Heifetz)’는 꽤 도전적인 시도다. 그는 이 앨범을 준비하며 20세기 최고 바이올리니스트 야샤 하이페츠가 다룬 스트라디바리우스로 연주하는 행운을 누렸다. 그만큼 하이페츠의 연주와 비교되기 쉽지만 두에냐스는 선을 그었다. “녹음을 준비하면서 제가 하이페츠를 모방하려 한다고 볼 위험이 있어 상당히 조심스러웠습니다. 그를 모방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누구도 그처럼 연주할 수 없습니다.”
그럼 왜 하이페츠를 파고들었을까. “여섯 살에 바이올린을 시작했을 때 메뉴인, 오이스트라흐, 셰링 등 여러 연주를 들었어요. 하이페츠에겐 아주 따뜻한 소리가 있습니다. 겉으로 볼 때 하이페츠는 차갑고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듯한 인상을 주지만, 그의 연주는 매우 따뜻하고 인간적입니다. 꾸며낼 수 없는, 대단히 솔직한 연주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그의 소리가 곧 그 자신처럼 느껴진다는 점이 정말 좋았습니다. 저 역시 외부에 휩쓸리기보다 제가 느끼는 대로 연주하려고 합니다.”
앨범 제목엔 경의를 뜻하는 ‘오마주(homage)’를 넣었다. 담을 곡으로는 하이페츠가 연주하던 랄로의 ‘스페인 교향곡’, 코른골트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골랐다. 스페인 교향곡은 조국인 스페인에 전하는 감사의 의미다. “집에 하이페츠가 랄로와 코른골트를 함께 녹음한 레코드판(LP)이 있었어요. 어릴 때 그 음반을 듣곤 했는데 최근에야 다시 떠올랐죠. 하이페츠와 코른골트는 미국으로 이주했다는 점에서 인간적인 연결 고리가 있습니다.”대가들 옆에서 느낀 세월의 감동
녹음 당시 구스타보 두다멜과 그가 이끄는 시몬 볼리바르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협연했다. “두다멜은 먼저 제 연주를 듣고 따라와 줬어요. 자신이 생각하는 연주법을 제게 설득하려 하지 않았죠. 두다멜도 바이올리니스트였고 여러 작품을 연주해봐서 많은 걸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질문을 던져도 그는 제 판단을 신뢰해줬죠.”
두에냐스는 많은 대가들과 함께했다. DG 첫 정규 앨범에선 빈심포니를 이끈 만프레트 호네크와 협업했다. “악단의 모든 요소를 다듬으며 세밀하게 작업하는 데 100%를 쏟아내는 지휘자”였다고. 주빈 메타가 이끈 서동시집(웨스트-이스턴 디반) 오케스트라와의 협연도 강렬한 추억으로 남았다. “열 살 때 처음 그를 만났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 무대에 함께 서니 무척 감동적이었습니다. 90세에 다다른 분이 ‘함께하자’며 저를 믿어준다는 건 제가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말처럼 느껴졌어요.”
“지휘자 블롬슈테트와 연주했을 때도 비슷했습니다. 당시 연세가 아흔아홉에 가까웠는데 그는 모든 걸 머릿속에 담고 있었어요. 거의 저만 바라보며 작품을 완전히 암기한 채 눈빛으로 소통했죠. 모든 것을 보고 겪은 듯한 사람 옆에 서면 제가 얼마나 작고 어린 존재인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요요 마와 함께한 실내악 공연도 소중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음악가인데도 겸손하고 소탈했습니다. 저를 아랫사람처럼 대하지 않고 같은 눈높이에서 바라봐줬죠. 저는 거만하게 굴기보다 무엇보다 먼저 인간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인간적인 사람을 좋아합니다.”묵직한 스트라디바리우스, 찬란한 과다니니두에냐스는 역사적 명기(名器)를 여러 대 다룬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11세에 대여한 ‘가글리아노’로 시작해 과르네리 델 제수 ‘문츠’, 스트라디바리우스 ‘캄포셀리체’ 등을 거쳐 현재는 1718년산 스트라디바리우스 ‘미켈란젤로’와 1779년산 과다니니를 쓰고 있다. 하이페츠가 사용한 1731년산 ‘하이페츠, 피엘’도 다뤄봤다.
“첫 명기 가글리아노는 맘 편히 연주하는 데 2년은 걸렸어요. 하지만 이 악기와 함께 단련하며 제 음색을 만들었죠. 악기마다 성격이 달라요. 내한 공연 무대에선 미켈란젤로로 브람스 협주곡을 연주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음향이 묵직하고 깊어 대형 협주곡이나 브람스, 쇼스타코비치처럼 무게감 있는 작품에서 빛을 발하죠. 반면 과다니니는 소리가 섬세하고 찬란하게 빛나 실내악과 피아노 협연에 좋습니다.”
두에냐스는 같은 곡을 연주하면서도 보잉이나 운지법을 바꾸곤 한다. “음악에서 ‘루틴’은 예술성을 조금 죽인다고 생각합니다. 공연엔 약간의 즉흥성이 있어야 해요. 저는 일부러 가장 편하지 않은 운지법을 고르기도 합니다. 중요한 건 소리죠. 머릿속에 원하는 소리에 맞춰 운지법을 택해요. 더 어두운 음색을 얻으려고 일부러 까다로운 G현으로 연주하기도 하죠.”
그는 직접 지은 베토벤 협주곡 카덴차를 무대에 올릴 정도로 작곡에 관심이 많다. “베토벤 자필 악보를 보면 계속 고쳤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용기를 얻어 자필 악보 속 아이디어를 카덴차에 활용했습니다. 작곡가의 양식 위에 제 것을 더하는 거죠. 바이올린과 하프를 위해 편곡한 스페인 작품도 완성했고, 앞으로 바이올린과 스페인 기타를 위한 음악이나 현악사중주도 써보고 싶어요.”
본업인 바이올린 연주에서는 20세기 음악 탐구와 50분에 이르는 대작 엘가 협주곡 연주를 준비 중이다. 쉴 때는 한강 작가의 소설을 읽거나 LP로 팝송을 듣는다.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하며 뇌의 작동 방식에 흥미를 느끼기도 한다고.
두에냐스는 어떤 음악가로 남고 싶을까. “저를 보러 온 사람들을 위해 매번 특별한 선물을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오늘날 세상엔 생각하기 힘든 일도 많지만, 공연장에 와서 다른 걸 잊고 오롯이 음악 안에 머물기를 바라요. 또 저는 ‘솔직함’을 좋아합니다. 제 음악을 즐기면서 솔직한 음악가로 저를 기억해주면 좋겠습니다.”
이주현 기자 de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