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효 15년째를 맞은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의 뿌리가 흔들리고 있다. EU가 친환경과 안전을 앞세워 내부 공급망을 강화하려는 입법 장벽을 치면서 FTA의 핵심인 시장접근 혜택을 지우고 있어서다. EU는 산업가속화법(IAA)과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포장 및 포장폐기물 규정(PPWR), 화장품 안전성 평가제도(CPSR) 등 4대 장벽을 마련했다. 어느 것 하나 한국의 주력 수출 산업을 비켜가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EU FTA가 사실상 형해화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진단이 나온다.
승용차 무관세, 정부조달 개방 무력화하는 IAA2011년 7월 발효된 한·EU FTA는 한국 통상에서 기념비적 협정이었다. 한국과 EU는 공산품 전 품목(100%)의 관세를 완전 철폐하는 시장 개방, 정부조달협정(GPA)을 넘어 중앙·지방정부와 공기업, 민자사업(BOT)까지 공공조달 시장을 서로에게 차별 없이 열어주기로 약속했다. 자동차·전기전자·화학·의약품 등 분야별 부속서로 불필요한 중복 인증과 기술장벽(TBT)도 허물기로 했다. 서로의 규제를 동등하다고 인정해 무역 장벽을 없애기로 한 셈이다.
이후 양측 교역 규모는 급성장했다. 산업통상부에 따르면 FTA 발효 직전인 2010년 833억달러에서 지난해 1368억달러로 약 64% 증가했다. 직접 투자에서는 한국의 대(對) EU 기여도가 상대적으로 컸다. 6월 기준 한국의 EU 누적 투자액은 1610억달러로, EU의 대한국 누적 투자액(1371억달러)을 웃돈다. 한국 기업들이 유럽 현지에 자동차·배터리 공장을 세우고 수만 명의 고용을 창출하며 유럽 제조 생태계의 핵심 축으로 자리 잡은 결과로 풀이된다.
지난 21일 산업통상부와 EU 통상당국은 화상으로 ‘제14차 한·EU FTA 상품무역위원회’를 열었다. 이 자리는 평소보다 딱딱했다고 한다. 유럽이 최근 높인 '비관세 입법' 수위를 높이고 있어서다.
한국의 EU 주력 수출품은 자동차·배터리와 전략산업인 원전·철강이다. 이번 상품무역위원회에서 우리 정부는 최우선 의제로 IAA과 CBAM에 대한 우려를 전달했다. FTA의 기둥인 관세 철폐와 정부조달 협정, 내국민 대우를 동시에 무력화할 수 있어서다.
한·EU FTA 원산지 규정에 따르면 한국 공장에서 생산된 완성차는 역내가치포함비율(RVC 55% 이상) 기준만 충족하면 유럽에 관세 0%로 수출돼 유럽산 차량과 동등하게 경쟁할 권리를 갖는다. 하지만 조만간 확정될 예정인 ‘유럽판 IRA(인플레이션감축법)’인 산업가속화법(IAA)은 이 규칙을 바꿀 가능성이 있다. 현재까지 논의되는 안에 따르면 EU 국내총생산(GDP)의 약 15%를 차지하는 공공조달 시장과 유럽 신차 판매의 약 60%를 좌우하는 법인차(기업 플릿) EU내 보조금·세제 혜택을 받으려면, 전기차를 반드시 ‘EU 역내에서 최종 조립’하고 배터리 제외 부품 가격의 70% 이상을 EU 역내산으로 채워야 한다. 법 시행 3년 뒤인 2단계부터는 배터리 셀과 양극활물질, 배터리관리시스템(BMS) 등 핵심 부품 5개 이상을 유럽 현지에서 조달하도록 강제하는 조항도 포함될 가능성이 있다.
한국에서 만들어 관세 0%로 수출한 현대차·기아 전기차는 사실상 유럽 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공공·법인차 시장에서 퇴출당하거나, 보조금 배제로 인해 10% 관세를 부과받던 FTA 이전보다 더 큰 가격 불이익을 떠안게 된다는 분석이 나온다. 중국 전기차의 '공습'에 속수무책인 EU의 조치가 한국 완성차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셈이다. 유럽 현지에서 조립하더라도 한국산 양극재와 배터리 부품을 쓰면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FTA 제9장(정부조달)이 보장한 공공조달 시장의 ‘내국민 대우’ 원칙도 훼손 위기다. IAA 초안에는 FTA 및 정부조달협정 체결국을 EU산과 동등하게 대우한다는 문구가 들어 있다. 하지만 EU 집행위원회가 위임입법을 통해 특정 국가가 호혜성이나 공급망 안보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하면 언제든 동등 대우를 박탈할 수 있는 조항도 심어 놨다. 정부는 EU측에 공공조달·지원 시 한국산 부품 및 최종 조립의 실질적 동등 대우 보장과 함께 자동차·저탄소 철강·원전 등 전략산업에 대한 예외 규정 마련을 강력히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후 장벽으로 꼽히는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는 FTA로 사라졌던 공산품 관세를 ‘탄소 비용’이라는 이름으로 부활시키는 조치다. EU는 철강·알루미늄 등 6대 원소재에 적용 중인 CBAM을 오는 2028년부터 철강·알루미늄이 들어간 자동차부품, 기계, 변압기, 가전 등 약 180개 하류제품으로 확대한다. 한·EU FTA로 3~6%의 관세를 면제받던 국내 중소·중견 부품·기계 업체들이 원소재 탄소 배출량 산정에 실패하면 EU의 징벌적 기본 배출계수를 적용받아 수출 비용이 급상승한다.
이는 FTA에서 약속한 무관세 혜택 대신 막대한 비용(탄소 인증서 구매 비용)을 물어야 할 판이다. 산업계는 EU가 국내 탄소 검증기관을 역내 기관과 동등하게 인정하지 않아 한국 기업들은 유럽 검증기관에 막대한 검증비와 공정 기밀을 넘겨야 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TBT 완화 약속대신 포장, 뷰티 규제한·EU FTA의 세 번째 기둥이었던 기술장벽(TBT) 완화 및 상호 인증 약속도 오히려 후퇴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온다. FTA에서 양측은 자동차, 전기전자, 화학물질 및 의약품·화장품 부속서를 별도로 채택해 과도한 기술 규정이나 인증 절차가 우회적인 무역장벽이 되지 않도록 명문화했다.
그러나 지난 8월 일반 적용이 시작된 EU 포장 및 포장폐기물 규정(PPWR)은 이 합의를 무력화할 수 있따. EU는 2030년부터 모든 포장재에 재활용 등급 기준과 재생원료(PCR) 의무 사용, 재사용 의무를 부과할 방침이다. 일반 소비재 뿐 아니라 첨단 반도체까지 규율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가령 반도체 웨이퍼와 트레이, 릴 등 포장재는 미세한 정전기(ESD)와 나노 단위의 오염을 막기 위해 초고순도 특수 복합소재 사용이 필수적인데, 재생 플라스틱 배합이나 포장재 재사용을 강제되면 공급망이 영향 받을 수 있다.
유럽 수출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K뷰티는 인증 장벽에 부딪혔다. EU 측이 역내 유통 전 화장품 안전성 보고서(CPSR) 제출을 의무화하고 있는데, 한국의 안전성 평가자 자격을 사실상 배제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내 전문기관이 작성한 안전성 보고서도 EU 회원국마다 인정 여부가 제각각인 상황이다. FTA를 통해 시험·인증의 동등성을 넓히기로 해놓고, 실제로는 K뷰티 기업들이 유럽 현지 대행사와 평가자에게 건당 수백만원의 ‘통행세’를 내도록 구조를 만든 것이다. 프랑스는 K원전·뷰티 장벽, 독일은 K배터리·부품 흡수EU측은 상품무역위원회에서 한국 정부에 해상풍력 진입장벽 완화, 전기차 보조금 개편, 주류 온라인 판매 허용 및 라벨 완화, 유아용 섬유 인증 간소화 등을 요구했다. EU의 양대 주축인 프랑스와 독일이 자국 산업 포트폴리오와 겹치는 한국의 경쟁 산업은 규제로 묶는 대신 주력국 산업의 한국 시장은 더 풀라는 요구를 하고 있는 셈이다. 독일·덴마크의 에너지·자동차 업계와 프랑스·이탈리아의 주류·명품 업계가 목을 매는 현안을 EU 측이 받아안고 있다는 분석이다.
최근 흕들리는 프랑스는 EU의 ‘공격적 보호주의’의 설계자다. 프랑스의 핵심 산업인 원자력발전(EDF), 중소형 전기차(르노·스텔란티스), 화장품(로레알) 등은 유럽 제조업 시장에서 한국과 포트폴리오가 겹친다. 프랑스가 IAA 입법에서 현대차·기아의 유럽 점유율 확대를 막고, 체코 두코바니 원전 수주전에서 확인된 한국 원전(팀코리아)을 역내산 규제로 묶으려는 포석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로레알을 위협하는 K뷰티는 CPSR과 PPWR로 견제하면서, 한국 정부에는 프랑스산 와인·코냑의 온라인 판매 허용과 위스키·브랜디 원액 함량 표기 철폐, 명품 유아용 섬유제품의 KC 안전인증 완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독일은 폭스바겐·벤츠·BMW 등 완성차와 철강·기계 산업을 보호해야한다. IAA를 통해 한국이 유럽 내 셀 생산능력의 80% 이상을 차지한 배터리 산업의 핵심 기술(양극활물질·BMS)을 유럽 본토로 강제 이전시킨다는 전략이다. 자국 철강·기계·부품 업계의 탄소 비용 역차별을 막겠다며 2028년 CBAM 하류제품 확대를 밀어붙이는 것도 독일이다. 그러면서 한국에는 독일 완성차에 불리한 전기차 보조금 평가기준을 완화하라고 압박하고, 지멘스에너지 등 유럽 풍력 기업들이 노리는 한국 해상풍력 입찰의 공급망 기여도 평가와 KS 인증 문턱을 낮추라고 요구하고 있다. 체코 등 동유럽 연대 강화하고 '패키지딜' 나서야정부도 총력전에 나섰다. 산업부는 지난 20~21일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로 김장희 신통상전략지원관을 급파해 IAA 법안을 심의하는 유럽의회 3대 상임위(내부시장·국제통상·산업에너지) 핵심 의원들을 연쇄 면담했다. 정부는 지난 15일 IAA 대응 민관합동 TF를 출범시키며 “한국은 유럽 공급망에 기여해 온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이니 동등성 원칙을 일관되게 적용해 달라”고 EU 측에 주장하고 있다.
통상 전문가들은 브뤼셀 집행위나 유럽의회를 상대로 한 ‘선의의 명분 호소’만으로는 EU가 쌓아올리는 보호주의 성벽을 뚫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한 통상전문가는 "집요하게 EU 내부의 고비용·저효율 딜레마를 파고 들어 중동부 유럽과 이해관계를 같이 해야한다"고 설명했다. 프랑스와 독일의 구상대로 원전 기자재와 전기차 배터리, 반도체 포장재를 서유럽 내부에서만 조달하려 하면 건설 단가와 제조 원가가 폭등하고 납기 지연이 상시화할 수 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한국과 이해관계가 정확히 일치하는 건 체코나 폴란드 등 중부 동부 유럽 국가들이다. 체코의 경우 두코바니에 이어 테믈린 3·4호기 원전 건설을 추진 중이다. 한국 배터리·자동차·방산 공급망이 밀집한 폴란드, 슬로바키아, 헝가리 등도 마찬가지다. 산업부 대표단이 스트라스부르에서 집중 면담한 유럽의회 부의장(마르틴 호이시크·슬로바키아)과 상임위 핵심 의원 상당수가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 출신이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EU가 한국에 내민 4대 시장 개방 요구서를 지렛대로 삼는 ‘주고받기식 패키지 딜’도 필요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EU가 한국 해상풍력과 전기차 보조금, 와인 온라인 유통망에 접근하고 싶다면 그 반대급부로 △IAA 위임입법에서 한국산 완성차·부품 및 원전·철강 공급망의 조건 없는 EU산 동등 대우 명문화 △2028년 CBAM 하류제품 확대 최소화 및 한국 검증기관 즉각 인정 △PPWR 반도체 특수 포장재 예외 인정 △화장품 CPSR 한국 학위·보고서 상호 인정을 맞바꾸자고 고강도 협상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통상 전문가는 “관세 0%라는 숫자에 안주하던 전통적 FTA의 시대는 끝났고, 이제는 보이지 않는 규제와 표준을 주고받는 ‘새 통상 전쟁터’로 진입했다”며 “EU가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FTA의 호혜성 원칙을 흔든다면, 우리 역시 시장 개방 지연이나 상호주의적 규제 적용을 불사하겠다는 명확한 시그널을 줘야 협상력이 생긴다”고 강조했다.
김대훈 기자 daep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