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반도체·배터리 다 AI 쓰는데…산업부, 국가핵심기술 유출 기준 '공백'

입력 2026-10-22 09:56
수정 2026-10-22 11:00

인공지능(AI)이 반도체·이차전지 등 첨단산업의 필수 연구개발 도구로 자리 잡았지만 주무부처인 산업통상부는 국가핵심기술 보유기업이 해외 AI 서비스를 이용할 때 적용할 유출 심사 기준조차 명확히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들의 잇단 규제 개선 요구에도 별도의 공식 유권해석이나 글로벌 AI 사업자와의 직접 협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22일 최수진 국민의힘 의원이 산업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산업부는 올 상반기 국가핵심기술 보유기업 20여 곳이 세 차례에 걸쳐 AI 활용 범위와 수출 심사(유출 심사) 기준을 명확히 해달라는 건의를 접수했다. 기업들은 "첨단기술 발전 속도와 치열해지는 글로벌 경쟁을 고려하면 더 이상 지체할 경우 기업경쟁력이 저하될 수 있다"는 의견도 전달했다.

하지만 산업부는 수년째 별도의 공식 유권해석 기준안이나 내부 법률검토 보고서를 마련하지 않았다. 산업부는 민간 전문가 등 13명으로 구성된 워킹그룹을 운영하며 국가핵심기술 보유기관을 위한 AI 활용 가이드라인을 준비 중이다. 다음 달 전문가 회의를 거쳐 내년 3월 산업기술보호위원회에 보고한 뒤 배포를 목표로 하고 있다.

핵심 쟁점은 국가핵심기술 관련 자료를 해외 AI 서비스에 입력하는 행위가 산업기술보호법상 무단 자료 전송 행위에 해당하는지 여부다. 현행 산업기술보호지침 제17조는 외국기업에 기술자료를 전송하거나 클라우드에 저장된 국가핵심기술에 대한 접근·열람·사용을 허용하는 행위 등을 자료 전송 심사 대상으로 규정한다. 국가 연구개발비를 지원받아 개발한 국가핵심기술은 원칙적으로 사전승인, 자체 개발한 기술은 사전신고 대상이다. 현재 반도체·디스플레이·전기전자·자동차·철도·조선 등 13개 분야 79개 기술이 국가핵심기술로 지정돼 있다.

문제는 해외 AI 서비스의 데이터 저장 위치와 실제 연산이 이뤄지는 서버의 위치가 다를 수 있다는 점이다. 국내에 자료를 저장하더라도 해외 서버에서 추론 작업이 이뤄지거나 외국 사업자가 기술자료에 접근할 수 있다면 자료 전송 심사 대상인지 판단해야 한다. 해외 AI 서비스 이용 자체가 불법 이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구체적인 판단 기준은 여전히 불명확하다. 국내 기업들도 R&D 단계에서 해외 AI 사용 실정은 제각각이다. 한 대형 디스플레이 기업은 오픈AI의 GPT 모델을 도입했으나 내부 자료를 올릴 시 사내 징계 정도에 그치며 제대로 된 사용 기준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국가핵심기술 보유기업은 AI에 입력할 수 있는 자료의 범위뿐 아니라 분석 결과물의 기술적 민감성까지 고려해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서울의 한 대학 교수는 "생산·품질 데이터 개별로 보면 가치가 낮을 수 있지만 대량으로 결합하면 핵심 공정조건이나 기술적 노하우가 드러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최종 결과물을 빅테크가 취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기업들은 해외 AI 빅테크들의 데이터 처리 방식과 보안 수준을 직접 검증하기 어렵다는 점도 호소하고 있다. 자료가 어느 국가에서 처리되는지, 해외 본사 직원이 접근할 수 있는지, 입력자료가 모델 학습에 사용되는지 등 기술적으로 이를 보장받을 방안을 마련해달라는 것이다. 이에 기업들은 일정한 보안요건을 충족하는 기업용 AI 인증제인 '화이트리스트'와 글로벌 AI 사업자와의 표준계약서 마련을 요구했다.

산업부는 마이크로소프트(MS)·구글·오픈AI 등 글로벌 사업자와 가이드라인 마련을 위해 직접 면담하거나 공문으로 협의한 적이 없다고 답변했다. 이들의 데이터 처리계약(DPA)이 국내 산업기술보호법에 부합하는지 검토한 별도 법률보고서도 작성하지 않았다. 다만 민간 전문가들을 통해 해외 사업자와 접촉하고 있다고 밝혔다. 산업부 관계자는 "국가핵심기술 보유기업들이 기술 유출 우려 없이 AI를 활용할 수 있도록 관련 정책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산업부가 검토 중인 가이드라인은 계약단계와 실사용 단계로 나뉠 전망이다. 계약 단계에서는 AI사업자와 계약할 때 입력자료와 답변을 모델 학습에 사용하지 않도록 하고, 처리 후 삭제와 암호키의 기업 직접 관리, 해외 운영인력의 접근 제한 등을 확인하는 내용이 담길 예정이다. 실제 사용 단계에서는 회사가 승인한 AI 계정만 이용하고 민감정보를 제거한 뒤 입력하며 이용기록을 보관·점검하도록 마련할 계획이다.

AI 활용 효과는 산업 현장에서 나타나고 있다. 글로벌 컨설팅업체 캡제미니가 이달 12일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12개국 자동차 업계 고위 임원 800명을 조사한 결과 AI 활용 성과가 높은 기업군은 제품 개발주기를 17% 단축하고 엔지니어링 생산성을 19% 높인 것으로 나타났다.

최 의원은 "일반 공개 정보를 다루는 범용 AI와 수조 원의 반도체 공정 레시피가 투입되는 국가핵심기술 기업용 AI는 안보·법적 리스크의 차원이 다르다"며 기업용 AI 보안 인증제와 표준계약서를 마련하고, 국내 저장과 암호키 자체 관리 등 보안요건을 충족한 경우의 판단 기준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영총 기자 youngcho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