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이 이렇게 달다고?"…제주 구좌 '당근 로드'

입력 2026-10-21 10:54
김밥이나 반찬에 들어간 당근은 늘 젓가락이 피해 가던 존재였다. 맛보다는 색을 내고 식감을 채우는 조연이었다. 그러나 제주 당근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제주의 구좌 당근은 검은 화산토에 뿌리를 내리고, 겨울의 눈보라를 견딘 덕에 과일처럼 달고 묵직한 맛이다. 밭에서 갓 뽑아 올린 당근을 한입 베어 물면 익숙했던 당근의 맛이 사뭇 새롭게 다가온다.

구좌에서 당근은 더 이상 접시 한구석에 머물지 않는다. 부드럽고 따뜻한 수프가 되고, 버거의 당당한 주인공이 되며, 쌉싸름한 커피와도 어우러진다. 구좌에서 자란 당근이 우리 식탁에 오르기까지, 그 길을 따라가 봤다.

구좌 당근, 검은 화산토와 칼바람이 키워낸 단맛

구좌 당근을 제대로 알고 싶다면 먼저 당근밭을 봐야 한다. 구좌에서 4천 평의 당근밭을 일구는 유도균 농부는 23년간 광고 회사에서 일하다 2014년 제주로 내려왔다. 이웃 할머니의 “이 동네는 당근과 콩이다”라는 말로 시작된 농사였다. 제주의 화산토는 물 빠짐이 탁월해 뿌리작물인 당근이 땅속 깊이 곧게 내리기에 이상적인 환경을 마련해 준다.


하지만 좋은 땅만으로 맛있는 당근이 자라는 것은 아니다. 올해는 파종 뒤에도 비가 내리지 않아 농부는 새벽마다 급수탑 앞에 줄을 섰다. 어렵게 싹을 틔운 것도 잠시, 이번에는 귀뚜라미가 새싹을 갉아먹었다. 농약을 쓰지 않는 농부는 밤마다 랜턴과 파리채를 들고 밭고랑을 누벼야 했다. 그렇게 가뭄과 해충을 견뎌낸 당근 앞에는 매서운 겨울이 기다리고 있다. “겨울을 제대로 버텨야 진짜 맛이 들어요” 칼바람을 함께 버텨낸 농부의 확신이 그 한마디에 담겨 있다. 겨울 눈보라를 맞으면 당근은 얼어 죽지 않기 위해 잎의 영양분과 당분을 모두 뿌리로 밀어 넣는다.

이 계절을 견뎌낸 구좌 당근의 맛을 온전히 느끼는 방법으로 농부가 권한 것은 단순했다. “생으로 먹어보세요” 익히거나 다른 재료와 섞기보다 먼저 당근 자체를 맛보라는 것이다. 흙을 털어낸 당근을 한입 베어 물면 아삭한 식감과 함께 씹을수록 은은한 단맛이 혀끝에 맴돈다.

당근 로드, 구좌의 식탁들

밭을 나서며 흙 묻은 당근이 식탁 위에서 어떤 모습으로 변신할지 궁금해졌다. 구좌의 마을 길을 따라가니 당근의 색다른 변신을 만날 수 있었다.

즙을 낸 당근은 레몬을 만나 새콤한 소르베가 되고, 부드러운 우유와 섞이면 라떼가 된다. 청년 농부들이 모인 소농로드의 박정숙 대표는 “이 한 잔으로 인위적인 단맛이 아니라 자연의 단맛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레몬의 상큼함과 당근 특유의 단맛이 번지는 당근 레몬 소르베는 색다른 조화를 선사한다. 채소의 풋내를 부드럽게 감싸안는 당근 라떼 역시 당근의 새로운 매력을 일깨운다.

당근을 빵 사이에 끼우면 든든한 한 끼가 된다. 월정리의 버거캐럿에서는 당근이 주인공이었다. 김유민 대표가 메뉴를 개발하며 가장 경계한 것은 재료에 지나치게 손을 대는 일이었다. “당근이라는 재료를 강조하려고 너무 많은 변형을 하면 오히려 본연의 매력이 사라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캐럿버거를 한입 베어 물면 두툼한 패티와 소스 사이로 새콤달콤한 당근 라페가 어우러져 상큼함을 더해준다. 바삭한 감자튀김 위에 가늘게 채 썬 당근 튀김을 소복이 올린 캐럿프라이에도 같은 철학이 담겼다. 익숙한 음식에 당근을 더하되, 본연의 맛과 매력은 그대로 살렸다.

불 위에 올리면 당근은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15년 동안 카페를 꾸려 온 마노아의 최혜경 대표는 구좌에 와서 당근을 다시 봤다. “당근으로 수프와 잼도 만들 수 있더라고요” 당근을 듬뿍 넣은 수프는 최 대표가 당근 본연의 색과 맛, 향을 가장 편안하게 느낄 수 있는 메뉴로 꼽는 메뉴다. 따뜻하고 녹진한 수프에 식전 빵인 당근 치아바타를 곁들이고, 오래 졸여 만든 당근 잼을 듬뿍 얹어 먹는다. “당근으로 잼을?” 하며 고개를 갸웃하던 사람도 당근의 달콤함을 맛보고 나면 최 대표의 말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바다로 향하면 당근은 마침내 커피와 만난다. 쪽빛 세화 바다가 내다보이는 카페공작소는 이 생소한 조합을 당근 콜드브루로 풀어냈다. 연하게 내린 콜드브루 아래에는 진한 당근 주스가 층을 이룬다. 잔을 기울이면 커피의 쌉싸름함 뒤로 당근의 달콤함이 따라온다. 케이크를 곁들여 마시는 한 모금, 당근이 존재감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당근을 따라 구좌 곳곳을 걷다 보니, 돌담 너머 당근밭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초록이 뒤덮인 땅속에는 계절을 품은 주황 당근이 자라고 있다. 평범한 식재료 하나를 따라간 여행이었지만, 그 길에서 제주의 또 다른 색과 맛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제주=신유빈, 황은정, 이건도, 유아영 인턴 기자 / 배경민 한경닷컴 기자 bk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