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치다, 찍다, 타격하다, 쓸다, 그리고 걷는다.
지난 20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IBK기업은행챔버홀에서 열린 피아니스트 율리우스 아살의 리사이틀은 피아노를 '치다'라는 서술어 하나만으로는 담아낼 수 없을 만큼 극적인 무대였다.
건반 위를 자유롭게 누비는 아살의 손길은 피아노를 단순한 선율 악기가 아닌 타악기로 다루며 강렬하면서도 리드미컬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그러면서도 극도로 여린 음에선 한없이 맑고 투명한 음색을 끌어냈다. 메이저 국제 콩쿠르 수상 경력 없이도 클래식 명가 도이치 그라모폰(DG)이 왜 그를 전속 아티스트로 선택했는지, 그 이유를 온몸으로 증명해낸 개성 넘치는 무대였다.
아살은 공연을 앞두고 프로그램 순서를 과감히 변경했다. 당초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번으로 무대를 열 예정이었으나, 그 자리에 버르토크의 '피아노 모음곡'을 배치하고 이어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2번으로 1부를 채웠다. 마지막 순간까지 음악적 서사를 두고 치열하게 고민했을 연주자의 흔적이 엿보인 대목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첫 곡 '피아노 모음곡'은 아살이 공연 전 인터뷰에서 언급한 '악령(Demon)'의 존재를 단번에 떠올리게 했다. 때로는 비밀스럽고 장난기 가득하게, 때로는 숨 막히는 긴장감을 유발하는 크고 작은 악령이 발걸음을 옮기는 듯한 잔상이 음표 사이로 번졌다. 모음곡의 마침표를 찍는 4번곡에선 아스라한 연기가 피어오르듯 스산하고 몽환적인 음향을 자아냈다.
곧바로 이어진 베토벤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 32번은 엄숙한 도입부로 객석을 압도했다. 직전 곡이 남긴 아스라한 잔향과 진한 대비를 이뤘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연주자가 프로그램 순서를 재배치한 이유를 가늠할 수 있었다.
1악장의 강렬한 소용돌이를 지나 2악장은 저 너머 평온의 세상으로 향하는 아늑한 여정이었다. 고요한 멜로디와 여린 음표 하나까지 섬세하게 다듬어내는 연주자의 기량이 빛났다. 재즈 선율을 연상시키는 변주 부분에선 리듬을 타며 고개를 흔드는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틀에 얽매이지 않는 아살 특유의 자유로운 영혼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순간이었다.
2부 시작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번이었다. 청년 베토벤의 패기가 깃든 이 작품에서 아살은 고전적인 형식미를 잃지 않으면서도 특유의 유연한 호흡으로 곡에 생동감을 불어넣었다. '매우 빠르게' 연주해야 하는 4악장에 이르러선 마치 속도 제한이 없는 독일의 고속도로 아우토반을 달리듯 거침없으면서도 매끄러운 질주를 선보였다.
이어진 곡은 이번 리사이틀의 하이라이트인 레라 아우어바흐의 '엠마 하우크의 러브레터'. 아우어바흐가 아살에게 헌정한 이 작품은 정신병원에 감금된 채 남편을 그리워하는 독일 여성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곡으로 이날 아시아 초연으로 한국 관객과 만났다.
묵직한 저음으로 시작한 작품은 시간이 갈수록 서로 다른 농도의 어둠을 쌓아 올렸다. 반복되는 불안과 내면의 공포,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감이 음의 형상으로 거대한 벽을 이뤘다. 멜로디의 흐름보다 몇 개의 악구가 만들어내는 날 것의 감각에 온전히 집중하게 만드는 강렬한 경험이었다.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나는 연주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프로그램의 마지막을 장식한 버르토크의 '세 개의 벌레스크'는 마치 악령들이 벌이는 난장판처럼 기묘한 분위기로 시작해 날카로운 불협화음을 지나 강렬한 타격음으로 끝맺었다.
공식 연주가 끝난 후에도 아살의 에너지는 식지 않았다. 그는 앙코르만 무려 7곡을 선사하며 관객들의 열띤 환호에 화답했다. 자신만의 감성으로 직접 편곡한 가수 김광진의 '편지'를 비롯해 이날 무대에서만 들을 수 있는 즉흥곡까지, 깊어가는 가을밤과 어울리는 음악 선물이었다.
허세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