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어떤 말은 정책이 되고

입력 2026-10-20 18:23
수정 2026-10-21 02:22
재작년 8월 구청장실에 반가운 얼굴들이 찾아왔다. 대성고 학생 다섯 명이었다. 공공정책을 제안하고 싶다기에 기쁜 마음으로 맞이했다. “선일초 주변 도로를 일방통행으로 변경해달라”는 민원이었는데, 실은 이전부터 걱정거리였다. 갈현로29길과 33길은 인근 예닐곱 학교 학생들의 통학로인데 좁은 인도 탓에 일부 학생들은 차도로 다녀야 하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다 준비했는지 파워포인트(PPT) 속 사진이며, 통계 수치까지 나름의 근거를 제시하는데 대단했다. 진지하게 필요성을 피력하는 학생들을 보며 대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고민을 실현하고자 도로과, 교통행정과, 경찰 등이 머리를 맞댔다. 신호체계나 버스 노선 변경 등을 다각도로 검토했다. 심도 있는 토의 끝에 현상 유지가 합리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아쉬워하기보다 새로운 관점과 배움을 얻었다며 기뻐했다. 전문가들과 대화를 통해 사고의 폭이 넓어졌다고도 했다.

1년 뒤, ‘제대로’ 문제를 풀기 위해 아이들이 다시 구청을 찾았다. 이번엔 주민자치회, 학부모운영위원회, 교원, 경찰, 운수업체까지 총출동했다. ‘일방통행’이라는 수단 대신 ‘통학로 안전’이라는 본질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한 학생이 아이디어를 냈다. 선일초 정문을 통해 같은 재단 학생들의 내부 통행을 유도하고, 대성중고교 학생들은 기존 통학로를 이용토록 해 이용자를 분산시키는 방안이었다. 회의장에서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

행정가로서 느끼는 안타까움 중 하나는 제기되는 민원이 대부분 이미 행정관청에서도 알고 있다는 점이다.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면 바로 해결했겠지만, 상위 기관의 승인을 거쳐야 하거나 혹은 개인 재산이라 함부로 손댈 수 없다거나, 제도적 한계나 복잡한 이해관계로 지지부진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렇게 ‘대화하는 자리’가 꼭 필요하다. 구민과 행정관청이 고민을 나누면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관점에서 새로운 해결책이 튀어나온다.

최소한 은평에서는 주민의 말이 곧 정책이 된다. 민원에 대해 관성적으로 답하지 않고 ‘대화의 물꼬’를 트려 하기 때문이다. 집요한 문제 제기와 행정의 진지한 검토가 만나 새로운 길이 열리는 소통의 ‘참맛’을 보고 나면 계속해서 ‘주민들에게’ 뛰어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아파트 간담회, 학부모 간담회, 경로당 간담회를 열었다. 41개 아파트 단지 주민, 66개 학교 학부모, 32개 경로당 어르신을 만나 즉답이 가능한 것은 현장에서 바로 해결하고, 당장 풀기 어려운 숙제는 공약과 정책으로 다듬어낸다.

구민의 일을 어떻게 그리 잘 아느냐는 질문에 대한 내 답은 간단하다. 직접 들었기 때문이다. 구민과의 대화는, 구청장으로서 직에 임하는 나의 비기(?器)다. 어떤 말은 사라지지만, 어떤 말은 경청하는 이를 만나 현실이 된다. 거창한 정책이란 없다. 주민의 한마디를 놓치지 않고 진심으로 내 일처럼 고민하는 것, 적어도 은평의 정책은 그렇게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