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스테이에서 밤을 즐기는 방식은 여행자의 수만큼이나 다채롭다. 시끌벅적한 음악 속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활기차게 에너지를 나누는 숙소가 있는가 하면, 조용히 마주 앉아 책장을 넘기며 낮은 목소리로 온기를 나누는 곳도 있다.
어느 쪽이 맞고 틀리다는 게 아니다. 다만 관계의 피로에서 벗어나 온전히 나를 복원하고 싶은 나홀로 여행자에게는, 소음이 걷힌 자리에서 건네는 다정한 한마디가 절실할 때가 있다.
동쪽 조천의 정겨운 마당과 서우봉 너머 북촌리의 책방 거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조용한 쉼의 스펙트럼’을 만들고 있는 두 호스트를 만나봤다.
음악이 흐르는 마당, 하모 제주
조천읍 함덕의 활기찬 해변가에서 골목 안쪽으로 조금만 걸어 들어가면, 마당이 딸린 정겨운 촌집 ‘하모 제주’가 모습을 드러낸다. 귀여운 강아지 하모가 뛰노는 평상 너머로 ‘청음실’과 ‘낯가림 책방’에는 늘 잔잔한 음악이 흐른다.
“너무 실망하실 것 같은데...거창하지 않아요” 하모 제주의 대표는 전 주인이 가꾼 아늑한 골격을 자신의 결에 맞게 조금 손봤을 뿐이라며 웃었다. 20대, 음악이 좋아 MP3 플레이어 제조사에서 일하기도 했던 그의 취향이 곳곳에 묻어있었다. 최근에는 ‘낯가림 책방’에 스크린과 빔프로젝터를 들여 여행자들과 영화를 나눌 채비를 마쳤다.
최대 열한 명이 머무는 제주 하모의 투숙객 대부분은 홀로 제주를 찾은 여행자들이다. 떠들썩한 술 파티 대신 소박한 교류를 택한 이유는 명확했다. “파티 게스트하우스가 나쁜 게 아니라 제 성향과 맞지 않아서 이런 방향을 추구하게 됐어요.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든지 둘러앉아 속 편한 대화를 나누는 분위기가 좋았거든요” 사람들이 마주 앉은 자리에는 따뜻한 정이 채워졌다.
“제가 복이 많은 건지, 흔히 말하는 진상 손님은 없었어요” 넉 달 사이 네 번이나 찾아와 함께 고기를 굽고 집 수리를 거든 단골부터, 투숙객 모두가 함께 밤바다에서 수영을 하고 끓여 먹었던 따뜻한 라면까지. 하모 제주 대표는 사람들의 그 행복한 표정들이 이 공간을 지키는 가장 큰 힘이라고 말한다.
낭만으로만 버틸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하지만 유쾌한 밤의 뒤편에는 냉정한 자영업의 무게가 도사린다. 관리비와 전기료는 치솟지만 숙박비를 쉽게 올릴 수도 없고, 겨울 비수기에는 난방비 때문에 적자를 보기 일쑤다. “수익이 있어야 이곳을 계속 유지할 수 있잖아요. 낭만만 좇다 보면 망가질 수 있습니다”
매일 밤, 손님들과 마주 앉는 일 역시 체력이 부치는 일이다. 그럼에도 웬만하면 호스트 자리를 지킨다. “손님들과 편안한 대화를 나누는 게 저의 큰 장점이라고 생각했어요” 편안하게 머물다 간 손님들이 다시 제주 하모의 문을 두드리게 만드는 것, 그가 찾은 생존 방식이다.
지친 마음이 쉬어 가는 곳, 서점숙소
몸과 마음이 지치고 위로가 필요한 날이 있다. 그런 날에는 서우봉 너머 북촌리에 있는 ‘서점숙소’에 가 보는 건 어떨까.
서점숙소의 대표는 10년 전 서우봉 산 중턱에서 내려다본 북촌리 마을 풍경에 마음을 빼앗겼었다.
“원래 스테이를 열고 싶던 곳은 부여였지만 인프라가 부족했어요. 낭만보다는 생존을 위해 여행자가 많은 제주를 택했는데, 일주일 뒤 운명처럼 지금의 집이 매물로 나왔죠. 살다 보니 제주도 어딜 가도 이 동네만큼 예쁜 곳은 없더라고요”
파티 대신 펼쳐 든 책, 그리고 사랑에 관한 ‘북토크’
이곳 역시 투숙객의 대부분은 혼자 문을 열고 들어온다.
“혼자라야 비로소 속마음을 꺼내놓게 되거든요”
책을 매개로 한 숙소를 꾸리게 된 데는 대학 시절 배낭여행이 큰 계기가 됐다. “해외 게스트하우스에서는 여행자들이 자연스럽게 거실에 둘러앉아 깊은 속마음까지 나누곤 했어요. 떠들썩한 파티 문화도 매력 있지만, ‘조용히 생각을 나누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공간도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고민 끝에 책을 선택하게 됐죠”
서점숙소의 대표 프로그램은 ‘사랑’을 주제로 한 북토크다. 10년 전 남동생과 연애 팁을 얻어보자며 소박하게 시작했던 자리가, 이제는 매일 밤 사람들이 둘러앉아 인생과 관계의 결핍을 털어놓는 진솔한 시간이 됐다. 서점숙소 대표가 추천하는 책은 이승우의 ‘생의 이면’과 ‘사랑의 생애’다.
“살면서 자기감정을 솔직하게 마주할 기회가 많지 않잖아요. 내 안의 결핍까지 들여다볼 때 비로소 타인을 이해하는 사랑의 시작점이 되기도 하니까요”
바쁜 일상 속에서 무심히 지나쳤던 마음속 감정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시간, 서점숙소의 밤이 유독 깊은 여운을 남기는 이유다.
역대 최저 매출에도 지키는 거실
서점숙소 대표는 제주의 관광업 침체와 비수기가 겹쳐 “올해가 10년 래 최저 매출”이라며 어려움을 털어놓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아끼는 공간을 묻자 여전히 프로그램이 열리는 ‘거실’을 가리켰다. 10년의 세월을 버티게 해 준 힘은 결국 그 거실에서 낯선 이들과 나눈 다정한 이야기들이었다.
나아가 손님들에게 숙소 근처 ‘너븐숭이 4·3기념관’을 꼭 방문하길 권한다. “북촌리는 4·3의 아픔이 깊게 새겨진 마을이에요. 제주의 역사와 슬픔을 알고 나면, 이 바다와 골목이 한층 더 깊은 울림으로 다가오거든요”
숙소에서의 사색이 마을 전체의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대목이다.
두 호스트가 공간으로 건네는 답
음악이 흐르는 하모 제주와 책장을 넘기는 서점숙소. 두 스테이의 공간은 다르지만, 지키고자 하는 본질은 닮아 있다. 치유가 필요한 여행자들에게 ‘적당한 거리감 속에서 낯선 이와 나누는 무해한 온기’를 전하는 일이다.
취향의 스펙트럼이 넓어진 지금, 골목 안 작은 스테이들이 여전히 제주 여행의 소중한 한 페이지를 채우고 있는 이유다.
제주=강성민, 김다혜, 여시원, 김민서, 남경빈 인턴 기자 / 배경민 한경닷컴 기자 bk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