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따라가선 답 없다"…UNIST가 '위험한 공장'에 꽂힌 이유

입력 2026-10-20 15:56
수정 2026-10-20 16:00
“위험한 제조현장일수록 인공지능(AI)이 먼저 들어가야 합니다. 이런 ‘헤비듀티 AI(Heavy-duty AI)’특화가 목표입니다.”
박종래 울산과학기술원(UNIST) 총장(사진)은 20일 울산 UNIST 본관에서 한국경제신문과 만나 “중후장대(重厚長大) 제조업이 포진한 울산에서만 할 수 있는 고유한 영역”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울산은 조선, 자동차, 석유화학, 제철 등 고위험·극한환경의 제조공정이 밀집해 있는 지역”이라면서 “현장 데이터와 실증 환경을 산업현장에서 곧바로 확보할 수 있어 다른 지역이 쉽게 따라오기 어려운 경쟁력이 있다”고 했다.

박 총장이 이 영역에 집중하는 덴 범용 AI로 미·중 빅테크와 정면승부하기보다 한국이 강점을 가진 제조업에서 승부해야 한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박 총장은 “범용 AI 자체로는 미·중과 격차가 크다”며 “한국 제조업에 축적된 데이터와 노하우를 AI와 결합하면 우리가 잘할 수 있는 영역이 생긴다”고 말했다.

박 총장은 헤비듀티 AI의 성패가 ‘공정 단위의 문제 해결’에 달려 있다고 봤다. 제조업은 업종은 물론 같은 공장 안에서도 설비와 작업 조건이 달라 범용 모델 하나를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는 “조선업만 해도 선박 건조 전체를 한 번에 AX로 바꾸는 게 아니라 후판 용접 등 공정을 잘게 나누고 정밀도 향상이나 결함 탐지처럼 AI가 효과를 낼 지점을 찾아 공정별 해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산업 현장의 병목을 찾아 기업과 첨단기술 사이의 연결축을 역할을 하겠다는 게 박 총장의 구상이다. 기업은 공정의 병목과 데이터를 잘 알지만 AI·로봇·센서 등 필요한 기술을 모두 내부에서 확보하기 어렵다. 대학은 반대로 기술은 있지만 어떤 공정에 적용해야 산업적 가치가 생기는지 알기 어렵다. 제조 현장과 맞닿아 있는 UNIST가 기업의 문제를 연구 과제로 바꾸고 여러 분야 연구자를 붙여 실제 공정에서 검증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박 총장은 “현장을 가장 잘 아는 작업자·기업과 AI·공학 기술을 가진 연구자가 함께 문제를 정의하고 해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UNIST는 현장의 문제를 끌어올리는 방식부터 거꾸로 설계했다. AI 전문가를 길러 기업에 보내는 대신 이미 공정을 잘 아는 근로자에게 AI를 가르친다. 박 총장은 “거꾸로 생각했다. 현장에 있는 사람들부터 AI를 가르쳐보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5개월 과정 ‘AI 노바투스 아카데미아’에서는 기업 재직자가 일터에서 풀고 싶은 문제를 직접 가져와 2개월간 이론을 배우고 3개월간 프로젝트 기반 학습(PBL)으로 해법을 찾는다. 단순 재교육이 아니라 기업 내부에 숨어 있던 AX 수요를 발굴하는 셈이다. 실무자들이 현장에서 성과를 내자 관리자·최고경영자 과정과 산업체 재직자 대상 대학원으로까지 확대됐다.

현장에서 찾은 문제는 연구와 창업으로 이어진다. 한국수력원자력 직원이던 김기수 딥아이 대표는 노바투스에서 원전 설비 비파괴검사에 AI를 접목하는 아이디어를 구체화했다. 이후 한수원과 UNIST의 산학 R&D로 기술을 고도화했고 사내벤처를 거쳐 창업했다. 딥아이는 현재 열교환기 등 산업설비 결함을 AI로 판독하는 기술을 사업화하고 있다.

박 총장은 이 구조를 동남권 전체로 넓히겠다는 구상이다. UNIST가 지역 연구개발(R&D) 컨트롤타워를 맡아 중앙에서 내려온 과제를 수행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역 산업이 필요한 연구 주제를 먼저 발굴해 연구자와 기업을 연결하겠다는 것이다. 2024년 취임 당시 그가 내건 ‘울산의 스탠퍼드’ 비전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스탠퍼드대와 실리콘밸리처럼 UNIST와 울산도 서로를 키우며 ‘공진화(共進化·coevolution)’해야 한다”고 했다.


■ 박종래 UNIST 총장은
△1959년 경남 남해 출생
△1981년 서울대 섬유공학과 졸업
△1983년 서울대 대학원 섬유공학 석사
△1990년 영국 리즈대 섬유물리학 박사
△1992~1997년 성균관대 섬유공학과 교수
△1997~2024년 서울대 재료공학부 교수
△2014~2017년 서울대기술지주회사 대표이사
△2014~2017년 서울대 산학협력단 사업부단장·지식재산관리본부장
△2024년 UNIST 제5대 총장

안정훈 기자 ajh6321@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