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품·유통 사업을 기반으로 성장한 CJ그룹과 신세계그룹이 중앙일보 인수전과 미국 워너브라더스 인수 투자에 나서면서 국내 소비재 기업들의 사업 확장 경쟁이 상품을 판매하는 유통망에서 소비자 관심을 모으는 '미디어'로 옮겨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19일 업계에 따르면 CJ는 다우키움그룹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중앙일보 인수전에 합류했다. 앞서 신세계는 신세계프라퍼티를 통해 미국 워너브라더스 인수전에 10억달러(약 1조4000억원) 규모 지분 투자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CJ는 CJ ENM을 통해 영화·드라마·공연 등 콘텐츠 사업을 지속해왔다. 신세계 역시 오는 11월25일 개봉을 앞둔 박훈정 감독의 신작 '슬픈 열대' 등을 제작한 마인드마크를 2020년 4월 설립해 계열사로 두고 있다. 두 그룹 모두 기존 유통·콘텐츠 사업의 경계를 허물고 미디어·엔터테인먼트 영역으로 포트폴리오를 확장하려는 움직임으로 풀이된다.
CJ, 콘텐츠·미디어 사업 시너지 기대CJ는 CJ올리브네트웍스를 통해 중앙일보 지분 9.24%를 보유한 기존 주주다. 단일 주주 기준으로 중앙홀딩스(64.73%), 홍석현 중앙홀딩스 회장(15.63%)에 이은 3대 주주인데 중앙일보가 지난 7월 워크아웃에 들어간 뒤 경영권 매각을 추진하면서 CJ는 유력 인수 후보로 거론됐다.
CJ는 지난달 예비입찰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본입찰을 앞두고 다우키움과 손잡으면서 인수전에 합류했다.
일각에서는 CJ와 중앙일보가 고(故) 이병철 삼성 창업주를 뿌리로 하는 범삼성가(家)라는 연결고리에 주목한다. CJ로서는 기존 보유 지분의 가치가 훼손되거나 범삼성가의 지배구조 한 축이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이번 인수전을 관망하기만은 어려웠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다우키움 측에도 공동 인수 파트너가 필요했다. 신문법(신문 등의 진흥에 관한 법률)상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은 일반일간신문 지분을 50% 초과 보유할 수 있다는 규제적 제약이 있어서다. 단독으로 과반 지분을 확보할 수 없는 다우키움과 기존 주요 주주인 CJ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는 해석이 나온다.
CJ가 중앙일보를 구체적으로 어떤 사업과 연결할지는 공개적으로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중앙일보를 통한 뉴스·정보 분야 진출과 함께 다우키움이 보유한 콘텐츠 사업과의 연계 가능성에도 관심이 쏠린다.
다우키움은 웹툰·웹소설 플랫폼인 키다리스튜디오를 보유하고 있다. CJ ENM과 함께 콘텐츠 원천 IP 확보부터 영상 제작·유통까지 사업을 연결할 수 있는 구조다. 여기에 레거시 미디어인 중앙일보가 더해지면 웹툰·웹소설, 방송·엔터테인먼트, 뉴스·정보를 아우르는 사업 다각화가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도 나온다.
할리우드로 가는 신세계신세계는 해외 콘텐츠 기업의 인수 자금에 투자하는 방식을 택했다. 신세계프라퍼티를 통해 데이비드 엘리슨 파라마운트 스카이댄스 회장, 미국 투자운용사 레드버드 등과 함께 워너브라더스 인수에 10억달러를 투자한다.
파라마운트 스카이댄스는 워너브라더스 디스커버리를 주당 31달러에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지분가치 810억달러, 기업가치 기준 1100억달러에 달하는 거래로, 현재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 경쟁당국의 승인을 거쳐 거래 종결 절차를 밟고 있다.
주목할 부분은 신세계프라퍼티의 투자 구조다. 이번 투자는 기존 주식 매매가 아니라 케이맨제도에 설립된 투자기구 'RB Tentpole Co-Invest (P) Offshore, LP'의 지분 100%를 취득해 합병 법인의 신주에 간접 투자하는 방식이다. 전체 거래의 기업가치인 1100억달러와 비교하면 신세계프라퍼티의 투자금은 1%에 못 미친다. 업계에서는 이를 단순한 재무적 투자보다 파라마운트와 워너브라더스가 보유한 글로벌 지식재산권(IP)을 활용하기 위한 전략적 투자로 해석하고 있다.
신세계는 이번 투자를 통해 '해리포터', '왕좌의 게임' 등 워너브라더스의 지식재산권(IP)과 '미션 임파서블', '탑건' 등 파라마운트의 IP를 스타필드·스타필드마켓·스타필드빌리지 등 복합쇼핑몰과 경기 화성 스타베이시티 테마파크 사업에 접목한다는 구상을 제시했다. HBO Max, 파라마운트 플러스 등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와 신세계 계열사 멤버십을 연계해 고객 락인(lock-in) 효과를 높이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신세계는 2019년 비전 선포식 이후 약 10조원 규모의 화성 스타베이시티 테마파크 프로젝트를 추진해왔으며, 파라마운트와도 협업하고 있다. 이번 워너브라더스 인수 참여로 활용할 수 있는 콘텐츠의 범위를 넓힐 수 있다는 기대가 나온다.
신세계 측은 이번 투자가 "단순한 지분 투자를 넘어 엔터테인먼트를 결합한 새로운 사업 영역으로 다각화하는 디딤돌"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통업과 엔터테인먼트 간 시너지를 바탕으로 아시아를 대표하는 콘텐츠 허브로 도약하겠다는 구상이다.
이 구상이 실현되면 콘텐츠는 쇼핑몰을 알리는 광고를 넘어 방문 목적 자체가 될 수 있다. 특정 작품의 팬을 전시·체험시설로 유입시키고, 방문객의 소비를 식음료·상품 판매로 연결하는 방식이다.
"본질은 유통 기반 위에 신성장동력 모색"국내 주요 유통기업들의 미디어 사업 확장을 두고 "콘텐츠와 구매의 연결"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유통이라는 기존 사업의 기반 위에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미디어를 택했다는 것.
콘텐츠를 고객 유입과 구매로 연결하는 시도는 기존 사업에서도 나타난다. CJ ENM이 지난 8월 발표한 올해 2분기 실적에 따르면 커머스 부문 매출은 4028억원으로 전년 동기보다 4.4%, 영업이익은 260억원으로 21.2% 증가했다. 모바일 라이브 커머스 취급고는 161.3% 늘었다.
이는 콘텐츠와 판매 채널을 함께 운영할 때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외부 플랫폼에서 영상을 접한 이용자를 자사 앱으로 유입시키고, 시청을 구매로 연결하는 구조다.
물론 신문 인수에는 별도 판단이 필요하다. 뉴스는 오락 콘텐츠와 달리 보도의 신뢰성과 편집의 독립성이 핵심 자산이다. 유통·소비재 기업이 언론사를 보유하더라도 기사를 계열사 상품 판매나 홍보에 연결하는 접근은 매체의 신뢰를 훼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신중해야 한다는 분석이다.
미디어 부문 확장은 본업과의 접점을 넓히는 동시에 새로운 비용을 떠안는 선택이기도 하다. CJ ENM의 올해 2분기 실적에서도 미디어플랫폼 부문은 흑자로 돌아섰지만 TV 광고 매출은 전년 동기보다 20.9% 감소했다. 영화·드라마 부문은 105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콘텐츠와 플랫폼을 함께 보유하는 것만으로 안정적인 수익이 보장되지는 않는다는 의미다.
CJ와 다우키움의 구체적인 지분 보유 비율은 알려지지 않았다. 신문법상 지분 보유 제한을 충족하는 범위에서 컨소시엄 구조를 최종 확정해야 하는 과제도 남아 있다.
신세계 역시 투자 참여와 IP 활용 권리를 구분해 평가해야 한다. 지분 투자만으로 원하는 작품을 국내 시설에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향후 확보할 권리의 지역·기간·독점성, 별도 사용료와 시설 투자비가 실제 수익성을 좌우할 것으로 보인다.
두 그룹의 재무 여건도 변수다. CJ는 상반기 실적 부진과 주주환원 확대 여력의 제한이, 신세계는 향후 매출 둔화 우려가 존재한다. 이런 상황에서 이번 투자를 단기적인 수익성 개선보다 중장기적인 사업 포트폴리오 재편의 신호로 해석하는 시각이 우세하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두 거래 모두 투자 규모나 지분 구조 측면에서 아직 불확실성이 남아 있다"며 "향후 중앙일보 본입찰 결과와 워너브라더스 인수 거래의 종결 시점에 따라 두 그룹의 콘텐츠·미디어 전략 구체화 양상을 지속적으로 관찰할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김소연 한경닷컴 기자 sue12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