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한국 제조업의 화두는 ‘더 싸게, 더 많이, 고장 나지 않게’였다. 삼성전자도 반도체와 가전 생산력 강화에 집중하던 때다. 하지만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성능과 품질이 상향 평준화되면 결국 디자인에서 승부가 날 것으로 내다봤다.
이 선대회장은 1996년을 ‘디자인 혁명의 해’로 선언했다. 그는 “21세기는 결국 디자인, 소프트와의 싸움”이라며 “우리의 철학과 혼이 깃든 삼성 고유의 디자인 개발에 그룹 역량을 총집결하자”고 말했다. 기술과 품질 중심의 제조 기업이던 삼성이 디자인을 최우선 과제로 세운 전환점이었다. 이후 시장의 판도는 그가 전망한 대로다. 대부분 전자업체가 단순 성능보다 디자인에서 차별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삼성도 마찬가지다. 이 선대회장이 시작한 디자인 혁신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삼성의 브랜드 가치를 떠받치는 DNA로 자리 잡았다. ◇디자인 인프라에 대폭 투자삼성 디자인 혁신의 출발점은 1993년 후쿠다 다미오 당시 삼성전자 디자인 고문의 보고서다. 그는 삼성의 디자이너에 대한 낮은 인식과 보수적인 조직 문화를 꼬집었다. 같은 해 이 선대회장은 신경영을 선언하며 “앞으로 디자인하는 사람이 제일 중요해지고 개성화로 간다”고 말했다. 단순히 외관 개선이 아니라 ‘어떤 제품이어야 선택받을 것인가’라는 본질적 질문을 던진 것이다.
전폭적인 인프라 투자도 이어졌다. 1993년 삼성디자인멤버십 설립을 시작으로 미국 삼성디자인아메리카(1994년), 삼성 혁신디자인연구소(1995년) 등을 연이어 세우며 인재 육성과 연구 기틀을 다졌다. 1996년에는 사내 제품 기획 단계에서 디자인의 위상을 격상했다. 기존엔 엔지니어링 후가공 단계에서 디자인이 역할을 했지만, 이때부터 제품을 기획할 때부터 디자인 담당자가 참여했다. 2001년 디자인경영센터를 최고경영자(CEO) 직속 조직으로 독립시켰다.
이 선대회장의 노력에도 전통 제조업의 관성은 쉽게 깨지지 않았다. 그는 2005년 이탈리아 밀라노 전략회의에서 삼성의 디자인을 ‘1.5류’라고 일갈하며 ‘제2의 디자인 혁명’을 선언했다. 그는 “소비자의 시선을 붙잡는 시간은 평균 0.6초에 불과하며, 그 짧은 순간 발길을 멈추게 하지 못하면 이길 수 없다”는 강력한 메시지로 조직을 채찍질했다.
첫 결실은 2006년 출시된 보르도 TV였다. 와인잔을 닮은 모양과 스피커를 숨긴 디자인을 적용해 네모난 가전에 불과하던 TV를 ‘거실의 인테리어’로 바꿨다. 보르도 TV는 출시 6개월 만에 100만 대가 팔렸다. 보르도 TV의 흥행에 힘입어 삼성은 소니를 제치고 세계 TV 시장 1위 자리에 올랐다. ◇AI 시대 만개하는 디자인 DNA이 선대회장이 씨앗을 뿌린 디자인 철학은 가전과 모바일 전 영역으로 확산했다. 거실을 갤러리로 만든 ‘더 세리프’와 ‘더 프레임 TV’, 고객이 직접 색상과 소재를 조합하는 맞춤형 ‘비스포크’ 냉장고가 대표적이다. 삼성전자는 또 2020년 스마트폰을 패션 아이템으로 승화시킨 갤럭시Z 플립 시리즈를 시작으로 지난 7월 출시한 ‘갤럭시Z 폴드8’까지 기존 스마트폰 디자인의 한계를 깨기 위한 도전을 이어왔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도 이 선대회장의 디자인 경영 유산을 계승해 현장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이 회장은 2020년 이 선대회장 별세 후 첫 경영 행보로 전사 통합 디자인 전략회의를 주재하며 디자인 경영을 더 발전시키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당시 이 회장은 “디자인에 혼을 담아내자. 다시 한번 디자인 혁명을 이루자”고 강조했다. 이 회장은 삼성 디자인의 체질을 인공지능(AI) 중심의 사용자 경험으로 바꾸는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글로벌 무대에서의 성과도 잇따르고 있다. 삼성전자는 최근 세계 3대 디자인상 중 하나인 미국 IDEA 2026에서 45개 상을 받았고, 독일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 2026에서도 출품작 16개가 모두 수상하는 쾌거를 이뤘다.
업계 관계자는 “1996년 이 선대회장이 외친 디자인 혁명은 삼성의 정체성을 기술 중심에서 사용자 경험 중심으로 바꾼 전환점이었다”며 “30년간 축적된 디자인 DNA와 이 회장의 AI 시대 현장 경영이 결합해 삼성전자는 글로벌 시장에서 독보적인 초격차 무기를 갖게 됐다”고 평가했다.
김채연/노유정 기자 why2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