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포커스]
임진왜란을 겪은 조선의 재상 류성룡이 전쟁의 참상을 기록하고 후대에 경계의 메시지를 남긴 ‘징비록’이 영문 증보판으로 새롭게 나왔다. 2002년 첫 영문 번역본 출간 이후 24년 만이다. 새 판본은 관련 저술을 추가하고 인물·사건에 대한 주석을 대폭 보강해 해외 독자들이 당시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도록 했다.
류진 풍산그룹 회장 겸 한국경제인협회장은 10월 16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징비록’ 영문 증보판 국내 출간 기념 행사에서 이번 영문 증보판 출간에 대해 “한국의 고전을 넘어 세계의 고전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계기”라고 평가했다.
류 회장은 류성룡의 13대 후손이다. 이날 행사에는 번역자인 최병현 교수(전 호남대 영문학과 교수)와 미국 버클리대 동아시아연구소 관계자 등 국내외 학계 인사들이 참석했다.
‘녹후잡기’ 새로 번역하고 주석 확대
이번 증보판은 미국 버클리대 동아시아연구소가 2026년 초 출간했다. 최 교수가 2002년 번역한 초판을 바탕으로 내용을 보완하고 제목도 기존 ‘The Book of Corrections’에서 ‘Reprimands and Admonitions’으로 바꿨다. 잘못을 바로잡는다는 의미를 넘어 과거를 돌아보고 후대에 경계의 뜻을 전한다는 ‘징비록’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다.
가장 큰 변화는 류성룡이 ‘징비록’을 쓰는 데 참고한 기록인 ‘녹후잡기’를 새롭게 번역해 수록한 점이다. 주석도 대폭 늘렸고, ‘징비록’의 주요 사건을 정리한 연표와 류성룡의 생애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도 추가했다. 원문만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인물과 사건의 배경을 보완해 외국 독자의 이해도를 높이려는 취지다.
‘징비록’은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과 도체찰사를 지낸 류성룡이 전쟁을 겪은 뒤 집필한 기록이다. 전쟁의 경과와 조정의 대응, 군사·외교적 문제를 되짚으며 같은 재난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경계했다. 책 제목 역시 지난 잘못을 돌아보고 앞으로 닥칠 환란을 경계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외환위기 책임 공방이 번역의 출발점
최 교수는 1990년대 후반 미국 대학에서 한국문학을 가르치며 번역을 결심했다. 당시 미국 대학에는 한국문학과 역사를 영어로 공부할 만한 교재가 충분하지 않았다. 한국의 고전을 해외 독자에게 소개할 필요성을 느끼던 중 외환위기 당시 정치권에서 책임 소재를 둘러싼 공방이 벌어지는 모습을 보고 임진왜란 때의 당파 갈등과 책임 전가를 떠올렸다고 설명했다.
초판 번역은 약 1년 만에 마쳤지만 주석 작업에는 그보다 두세 배의 시간이 들었다. 버클리대 측도 출간에 앞서 주석을 보강할 것을 요청했다. 이후 영문판은 해외 대학의 강의와 동아시아사 연구에서 활용돼 왔다.
최 교수는 초판 출간 이후에도 아쉬움을 느꼈다고 말했다. 특히 책에 등장하는 한국·중국·일본 인물 약 340명의 생애와 역사적 배경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점을 보완하고자 했다. 여러 번역 작업을 거친 뒤 2022년 증보판 작업에 착수해 이번 판본을 완성했다.
“전쟁은 기억 속에서도 두 번 싸워진다”
최 교수는 이날 강연에서 전쟁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모든 전쟁은 두 번 싸워진다. 첫 번째는 전쟁터에서, 두 번째는 기억 속에서”라고 말했다. 전쟁은 전장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후 사회가 과거를 어떻게 기록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는 설명이다.
최 교수는 류성룡이 이순신을 천거하고 그의 업적을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에도 주목했다. 그는 “이순신을 이순신으로 만든 사람이 서애 류성룡”이라는 해석을 제시하며, ‘징비록’이 전쟁의 사실을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후대의 기억을 형성하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증보판은 지난 3월 캐나다 밴쿠버에서 열린 아시아학회 연례 학술대회에서도 소개됐다. 버클리대 동아시아연구소는 4월 22일 현지에서 출간 행사를 열었다. 이번 국내 행사는 영문 증보판의 의미와 해외 학계의 관심을 국내에 알리기 위해 마련됐다.
류 회장은 “조상은 후손을 낳고 후손은 조상을 만든다”는 말을 인용하며, “‘징비록’의 영문 번역을 통해 서애 선생의 역사적 통찰과 인간 극복의 교훈을 세계에 알리고 그 정신을 후세에 전하는 것이야말로 조상의 뜻을 되살리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