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인공지능(AI)에 너무 많은 돈이 몰린다는 걱정이 담긴 뉴스가 많죠. 데이터센터를 짓고 반도체를 사들이는 데 쓴 돈을 제대로 회수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죠. 그런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오히려 공장 짓는 속도를 높이고 있습니다. 'AI가 거품일 수 있다'는데, 두 회사는 왜 증설을 서두르는 걸까요.거품 우려에도 공급 요청 쇄도…장기계약 늘리는 고객사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 13일 AI 투자 열기가 꺾이면 세계 경제의 성장과 금융 안정이 흔들릴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AI로 기대만큼 돈을 벌지 못하면 기업 가치가 떨어지고, 투자에 동원한 빚을 갚기도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인데요. 시장조사업체 가트너도 지금과 같은 설비투자 속도가 이어지면 2030년 말까지 3조5000억달러가 넘는 AI 인프라 투자가 당초 평가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이런 경고들만 보고 있자면 'AI 투자 이제 그만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을 텐데요. 그런데도 메모리 업체에는 물량을 더 달라는 요청이 빗발치고 있습니다. SK하이닉스는 지난 7월 2분기 실적발표에서 주요 빅테크 기업들의 추가 공급 요청이 이어지고 있으며, 고객사 수요가 공급 역량을 웃돌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핵심 고객사를 포함한 10여개 고객사와 장기공급계약 협상도 마무리했죠.
"반도체를 사려는 고객사들이 줄을 서고 있다"는 말도 요즘은 흔한데요. 최근 제가 반도체 업계 관계자와 만나 얘기를 들어보니 "국내 메모리 기업의 낸드플래시 고객사가 신제품이 개발됐는데도 기존 제품을 더 비싸게 살 테니 장기계약을 먼저 요청하는 사례까지 있다"고 합니다. 신제품이 개발돼도 기존 제품을 계속 공급해달라는 것인데요. AI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겠느냐는 걱정 속에서도, 반도체를 사려는 고객사들은 줄을 서고 있는 것이죠.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도 공급 부족을 투자 배경으로 들었습니다. 이 회장은 올 상반기 청와대에서 열린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에서 "저희를 포함한 반도체 기업들의 적극적인 투자에도 불구하고 폭발적인 수요에 대응하기엔 부족하다는 것이 시장의 시각"이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삼성은 천안·온양의 고대역폭메모리(HBM) 생산시설 구축 등을 포함한 국내 투자계획을 발표했습니다.삼성·SK 증설 속도…ASML도 "장비 공급 부족"
주문이 밀려든다고 생산량을 곧바로 늘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SK하이닉스는 용인 첫 공장의 첫 번째 클린룸 개방 시점을 내년 5월에서 2월로 세 달 앞당겼습니다. 클린룸은 먼지 등 오염물질을 엄격하게 통제하는 반도체 생산 공간인데요. 지난 7월에는 청주 M15X의 양산 일정을 앞당기고, 용인 클린룸 개방 이후 생산능력을 빠르게 늘리기 위한 투자도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삼성전자는 평택사업장에 짓는 5공장(P5)으로 생산능력을 늘릴 계획입니다. 업계에 따르면 2028년 가동을 목표로 차세대 HBM에 들어갈 D램 생산을 준비하고 있는데요. 회사는 지난 2분기 실적발표에서 클린룸을 먼저 확보하되, 장비는 수요에 맞춰 탄력적으로 들이겠다는 방침을 밝혔습니다.
생산 공간을 마련해도 실제 물량이 나오기까지는 시간이 걸립니다. 가트너는 지난 8일 보고서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 키옥시아 등이 생산능력을 늘리고 있지만 시설 완공에는 통상 2~3년이 필요하다고 분석했습니다. 추가 생산시설이 공급량을 의미 있게 늘리는 시점도 내년 중·후반으로 예상했죠.
반도체 장비업계의 '슈퍼 을'로 불리는 ASML도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반도체 회로를 웨이퍼에 새기는 노광장비를 만드는 회사인데요. 지난 14일 실적발표에서 현재 계획한 2027년과 2028년 공급량으로는 고객사 수요를 모두 충족하기 어렵다고 밝혔습니다. 2028년 생산능력을 앞서 제시한 30% 증가 수준보다 더 늘리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죠. 크리스토프 푸케 ASML 최고경영자(CEO)에 따르면 일부 고객사는 2029년, 나아가 2030년 장비 주문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美·中 증설에 점유율 우려…최태원도 신속 대응 주문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는 지난 14일 세계 주요 9개 클라우드 서비스 업체의 내년 설비투자가 올해보다 60% 늘어 1조5000억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지난 8월 제시한 증가율 50%를 높여 잡은 것인데요. 서버와 부품 가격이 오르는 데다, 일부 부품 공급업체가 물량 확보의 조건으로 선급금을 요구하면서 고객사들의 지출 시점도 앞당겨지고 있다는 분석입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는 이 수요를 누가 먼저 잡느냐가 문제입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지난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연합뉴스와 만나 중국 업체들과 미국 마이크론의 증설 움직임을 언급했습니다. 이들이 더 빠르게 생산능력을 늘리면 한국의 시장점유율이 줄어들 수 있다고 우려했죠.
최 회장이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사업을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광주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생산능력을 계속 늘려야 한다는 입장인데요. 그는 "수요는 엄청나게 있는데 공장을 못 늘리면 그게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홍민성 한경닷컴 기자 m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