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빈 호른' 고집…빈 필은 소리부터 다르다

입력 2026-10-15 17:37
수정 2026-10-16 02:45
빈 필하모닉의 소리를 이야기할 때 흔히 먼저 꼽히는 악기가 둘 있다. 빈 오보에와 빈 호른이다. 둘 다 세계 대부분의 오케스트라가 오래전에 떠나보낸 옛 악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빈 호른은 유독 까다로운 악기다. 19세기 호른의 구조와 연주 전통을 이어온 이 악기는 오늘날의 호른보다 더 많은 힘을 들여야 소리가 난다. 음을 정확히 짚기 어렵고 높은 음에서는 소리가 삐끗 새어나가기도 하지만, 빈에서는 그 아찔한 순간마저 이 악기만의 사랑스러운 개성으로 받아들인다.


이처럼 세계 최정상의 악단이 굳이 이 옛 악기들을 놓지 않는 것은 그 소리가 곧 악단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빈 필하모닉에 빈 오보에와 빈 호른은 공연에 따라 골라 쓰는 도구가 아니라 대대로 지켜온 빈의 목소리다. 이번 무대에 오르는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과 브람스 교향곡 2번은 모두 빈에서 처음 세상에 울려 퍼진 작품으로, 빈 필하모닉 고유의 소리를 만나기에 더없이 어울린다. 특히 브람스 교향곡 2번은 1877년 빈 필하모닉이 직접 초연한 곡이다. 빈에서 태어난 음악을, 빈의 소리를 지켜온 악단이 연주한다는 것. 이번 무대에서 이 악단만이 낼 수 있는 소리에 특별히 귀 기울여 볼 만한 이유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 피아노가 먼저 말을 걸 때이날 무대의 첫 곡,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은 조금 낯설게 시작한다. 협주곡의 첫 소리는 대개 오케스트라의 것이지만, 이 곡에서는 피아노가 먼저 말을 건넨다. 모두가 오케스트라의 첫 음을 기다리는 순간, 피아노가 홀로 조용히 화음을 짚는다.

당시 비평가들도 이 조용한 피아노의 첫 등장을 낯설게 받아들였을 만큼 이 도입은 협주곡의 관례를 과감하게 벗어난 것이었다. 베토벤이 이 곡을 쓴 1805년에서 1806년 사이는 그의 창작력이 가장 뜨겁게 타오르던 시기였다. 교향곡 4번, 바이올린 협주곡, 라주모프스키 현악사중주가 모두 이 무렵에 태어났다. 이 협주곡이 품은 대담함도 그 흐름 속에 있다.

이렇게 완성된 곡이 청중 앞에서 처음 울려 퍼지기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걸렸다. 1807년 3월, 이 협주곡은 같은 시기에 완성된 교향곡 4번, 코리올란 서곡과 함께 베토벤의 후원자였던 로브코비츠 공작의 저택에서 비공개로 처음 연주됐다. 대중 앞에 처음 선 것은 그로부터 1년 반 넘게 지난 1808년 12월, 빈의 안 데어 빈 극장이었다.

200년이 넘게 흐른 지금, 이 곡은 베토벤이 살던 도시의 악단을 통해 다시 울려 퍼질 예정이다. 협주곡을 들을 때면 귀는 자연스레 독주자에게 향한다. 하지만 이 곡에서 피아노는 오케스트라 전체와만 대화하지 않는다. 특히 1악장에서는 현과 목관, 그 안의 여러 악기와 차례로 말을 주고받는다. 그러니 이번에는 대답하는 쪽에도 귀를 열어 두자. 그중에서도 목관, 특히 오보에의 음색이 조금 다르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호숫가에서 쓴 가장 밝은 교향곡, 브람스 교향곡 2번브람스 교향곡 2번은 빈 필하모닉과 각별한 인연으로 묶여 있다. 1877년 12월 30일 빈 무지크페라인에서 한스 리히터의 지휘로 이 곡을 처음 연주한 악단이 빈 필이었다. 악보가 아직 출판되기도 전에 올린 초연이었다

브람스는 첫 교향곡을 완성하기까지 20년이 넘는 세월을 보냈다. 그만큼 베토벤이라는 거인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런데 두 번째 교향곡은 달랐다. 1877년 여름, 오스트리아 남부 호숫가의 작은 마을 푀르트샤흐에서 그는 이 곡을 단숨에 써 내려갔다. 그래서인지 이 곡에는 그의 교향곡 가운데 가장 밝고 평화로운 기운이 흐른다. 흔히 브람스의 ‘전원 교향곡’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곡은 낮은 현악기가 조용히 읊조리는 세 음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곧 호른이 자장가처럼 포근한 첫 주제를 노래한다. 바로 이 순간, 빈 필하모닉이 이 불편한 악기를 고집해온 이유가 드러난다. 빈 호른에는 옛 자연 호른의 숨결이 남아 있다. 그 색채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곳은 1악장이 끝나갈 무렵이다. 호른 연주자 사이에서 손꼽히는 명장면이다. 여기서 호른은 길고 깊은 노래를 홀로 이어간다. 서두르지 않고, 한 음 한 음을 오래 머금은 채 좀처럼 놓아주지 않는다. 떠나 보내기 아쉬운 여름날의 끝자락처럼 말이다. 물론 더 많은 힘이 들고, 한 음도 쉽게 내주지 않는 악기다. 하지만 그 노래는 음과 음 사이의 틈마저 지워 버린다. 그렇게 끊김 없이 흐르는 동안, 소리는 세기에 따라 색을 바꾼다. 속삭일 때와 벅차오를 때 빛깔이 완전히 달라지는 이 음색은, 세계 어디에서도 쉽게 만나기 어렵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 빈 필은 불편함을 택한 것이다.

허명현 음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