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가 김치·두부·즉석밥 등 가공식품의 가격 담합과 재판매가격 유지 의혹 조사에 착수하자 식품업계에서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다. 내수 부진과 원가 부담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가격 조정과 유통업체 판촉 협의까지 조사 대상이 되면 정상적인 경영 판단도 위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업계에서는 내년 경영계획을 성장 투자보다 비용 절감과 규제 리스크 관리에 맞출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내수 부진·원가 부담에 가격 조정도 부담
15일 식품업계에 따르면 공정위 중점조사기획단은 전날부터 식품업체들을 상대로 현장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김치·두부·유지류·선물세트·즉석밥·장류 등 6개 품목의 가격 담합 의혹과 유통업체의 할인 판매를 제한했는지가 조사 대상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식품업계 관계자들은 조사 자체보다 가격 결정과 판촉 과정에서 어떤 행위가 위법 판단을 받을지 기준이 불분명하다고 토로한다. 오뚜기처럼 내수 매출 비중이 높은 기업은 원재료비와 환율, 인건비·물류비가 오르면 제품 가격이나 판촉 조건을 조정해야 하지만, 업체 간 정보 교환은 물론 유통업체와의 할인 협의까지 담합 의혹으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한 업계 관계자는 “원가 부담을 줄이기 위해 가격과 판촉을 조정하는 것까지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라며 “어떤 행위가 문제인지 기준이 분명하지 않아 현장에서는 보수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내수 시장의 성장 여건은 녹록지 않다. 해외 매출 비중이 높은 삼양식품은 올해 상반기 매출 1조4847억원, 영업이익 3533억원을 기록해 전년 동기보다 각각 37.2%, 39.0% 늘었다. 오리온도 같은 기간 매출 1조8239억원, 영업이익 2980억원으로 각각 15.5%, 17.9% 증가했다.
반면 CJ제일제당은 CJ대한통운을 제외한 2분기 매출이 4조1950억원으로 10.2% 늘었지만, 영업이익은 1619억원으로 18.4% 감소했다. 농심은 상반기 영업이익이 31.7% 증가했지만, 2분기 국내 별도 영업이익은 전 분기보다 32% 줄었다. 해외 사업이 전체 실적을 끌어올리는 가운데 국내 소비 부진과 원가 부담이 기업별 수익성 차이를 키우고 있다. 업계 “정상적인 판촉·가격 결정까지 위축”
K푸드가 세계 시장에서 주목받는 가운데 국내 사업의 가격·판촉 전략까지 위축되면 기업의 대응 여력은 좁아질 수 있다. 제품군을 줄이고 마케팅비를 조정하거나, 검증된 제품과 유통 채널에 자원을 집중하는 방어적 경영이 확산될 가능성이 있다. 당장은 비용을 줄일 수 있지만 신제품 개발과 브랜드 투자가 위축되면 새로운 수요를 창출할 동력도 약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다른 식품업계 관계자도 “소비가 살아나지 않는 상황에서 규제 부담까지 커지면 신제품을 내고 판촉을 확대하기보다 기존 제품을 관리하는 쪽으로 기울 수 있다”며 “기업들이 투자를 미루거나 줄이면 결국 시장의 활력도 떨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물론 가격을 함께 정하거나 유통업체의 할인 판매를 부당하게 제한한 행위가 확인된다면 제재가 필요하다. 다만 업계에서는 담합과 정상적인 가격 조정·판촉 협의를 구분할 기준을 명확히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식품 가격을 둘러싼 불공정 행위를 바로잡으면서 기업의 정당한 경쟁과 투자를 위축시키지 않는 균형이 과제로 떠올랐다.
식품업계의 내년 경영계획은 비용 절감과 해외 사업 확대에 무게가 실릴 가능성이 크다. 원가와 내수 부담 속에서 해외 사업을 성장축으로 삼으려는 흐름은 이미 이어지고 있다. 여기에 공정위 조사까지 더해지면서 국내 시장에서 가격 인상과 판촉을 둘러싼 의사결정은 한층 신중해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권용훈 기자 fac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