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란 전쟁 여파로 국제유가 변동성이 확대된 가운데 국내 정유 시장점유율이 절반에 육박하는 SK에너지와 HD현대오일뱅크가 약 4년간 휘발유·경유·등유 가격을 담합한 혐의로 공정거래위원회 제재 심의대에 올랐다. 공정위는 담합 영향 관련 매출액이 44조1000억원에 달한다고 보고 있다. 정유사 담합으로 결론 날 경우 수조원대 과징금이 부과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검찰도 지난 7월 2024년 7월부터 올해 2월까지 4대 정유사(SK에너지·HD현대오일뱅크·GS칼텍스·에쓰오일)가 14조원대 석유제품 가격을 담합했다며 정유사 법인과 관련 임직원을 기소했다.
하지만 정유업계는 이미 시장에 노출된 정보와 업계의 사후정산 거래 구조를 공정위가 담합 근거로 왜곡했다며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공정위는 2011년에도 휘발유 등 석유제품을 공급받는 주유소가 거래 정유사를 바꾸지 못하도록 담합한 혐의로 4대 정유사에 4000억원이 넘는 과징금을 부과했지만 대법원이 위법 판결을 내리면서 정유사들은 담합 혐의를 벗었다.
○SK에너지·HD현대오일뱅크 입금가 합의했나
공정위 사무처는 10월 7일 SK에너지와 HD현대오일뱅크의 휘발유·경유·등유 담합 사건에 대한 심사보고서를 해당 기업들에 송부하고 위원회 심의절차를 시작했다고 발표했다.
검찰의 공소장 격인 심사보고서는 공정위 심사관의 조사 결과와 조치 의견을 담은 문서다. 공정위 심사관은 두 정유사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직전인 2022년 2월부터 미국·이란 전쟁 발발 직후인 올해 3월까지 약 4년 동안 휘발유·경유·등유의 판매가격 관련 정보(입금가, 확정가, 판매정책)를 수시로 교환했다고 판단했다. 특히 미국·이란 전쟁 직후인 올 3월에는 두 차례에 걸쳐 특정 판매가격(입금가)를 적용하기로 합의한 것으로 봤다. 심사관이 파악한 관련 매출액은 약 44조1000억원에 달한다. 다만 대부분은 정보교환과 관련된 매출로 직접적인 가격 합의는 올 3월 두 차례에 그친 것으로 알려졌다. 공정위 관계자는 “전쟁 상황에서는 국제유가가 급변하기 때문에 이 부분이 정보교환을 시작하게 된 하나의 계기로 작용하지 않았나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공정위는 두 정유사의 이번 행위가 공정거래법상 가격담합 및 정보교환 금지 규정을 어긴 ‘중대한 위반행위’에 해당한다고 보고 시정명령과 과징금 부과 의견을 냈다. 관련 매출액의 최대 10.5%까지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는 규정을 감안하면 과징금은 최대 4조6300억원에 달한다. 국내 휘발유·경유·등유 등 석유제품 시장은 SK에너지와 HD현대오일뱅크, GS칼텍스, 에쓰오일 등 4개 정유사가 약 98%를 차지하는 과점시장이다. 지난해 기준 SK에너지 점유율은 28.1%, HD현대오일뱅크는 21.0%로 두 회사의 합계 점유율은 49.1%에 이른다. 단, 공정위는 GS칼텍스와 에쓰오일의 가담 증거는 확인하지 못했다. 담합 혐의를 받는 두 정유사는 심사보고서를 받은 뒤 8주 동안 서면 의견을 내거나 증거자료를 열람·복사할 수 있다. 이후 공정위 위원회가 법 위반 여부와 제재 수위를 최종 결정한다.
○정유업계 “공정위가 석유제품 유통 구조 이해 못해”
정유업계는 이번 공정위의 가격 담합 제재 착수가 입금가와 확정가 등 석유제품 유통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법 적용이라고 반발했다. 정유사의 국내 석유제품 거래는 통상 사후 정산 제도로 이뤄진다. 정유사는 도매업체·주유소에 휘발유·경유·등유 등을 공급할 때 우선 ‘입금가’를 정해 이 가격으로 석유제품을 판매하고 대금을 받는다. 이후 정유사는 시장 상황 등을 반영해 다음 달 초에 최종 가격인 ‘확정가’를 결정하고 이를 통해 입급가와 확정가의 차액을 정산한다.
정유업계는 이러한 ‘사후정산’이 일상적이라고 설명한다. 입금가 정보는 주유소 업주들의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손쉽게 확인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도 반박했다. 석유제품의 원료인 원유를 100% 수입해 쓰는 국내 정유사 특성상 국제가격 흐름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정유업계의 석유제품 가격 추이가 비슷한 이유다. 한 정유사 영업담당 임원은 “입금가는 사실상 공개정보로 문제가 없고 담합 혐의를 받는 두 정유사도 가격을 결정하기 전에 조율한 게 아니라 이미 가격을 정한 뒤 ‘우리는 얼마로 정했다’고 공유한 수준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SK에너지와 HD현대오일뱅크가 담합 혐의를 받고 있는 배경도 눈길을 끈다. HD현대오일뱅크는 2020년 SK네트웍스 석유제품 소매사업을 인수했다. 직영주유소 300여 곳과 영업자산, 관련 인력이 HD현대오일뱅크로 넘어왔다. 당시 HD현대오일뱅크로 옷을 갈아 입은 SK 출신 직원이 전 직장 관계자들과 단톡방 등에서 소통하는 과정에서 담합이 문제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종사자 간 통상적으로 주고받는 연락을 공정위가 담합을 위한 정보교환으로 몰아붙이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SK에너지·HD현대오일뱅크 미묘한 신경전도
SK에너지와 HD현대오일뱅크는 공정위 제재 착수에 대해 상당한 온도차를 드러냈다. SK에너지는 공정위 제재 절차 착수 발표 직후인 지난 8일 김종화 대표 명의의 입장문을 내고 담합 협의와 관련해 사과하는 한편 거래 관행 개선과 내부 통제 강화 조치를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우선 지난 6월 발표한 주 단위 공급가격 사전 확정·고지와 사후정산 폐지 제도를 차질 없이 시행하기로 했다. 가격·영업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임직원 대상 교육을 확대하고 1인당 2시간 이상의 공정거래 교육을 정례화한다. 경쟁사와의 업무상 접촉에 대해서는 사전승인과 사후보고, 모니터링 체계를 강화한다고도 했다.
반면 HD현대오일뱅크는 “심사보고서 상정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면서도 담합 혐의를 적극 부인했다. 회사 측은 입장문에서 교환된 정보는 이미 시장에 공개됐거나 여러 경로로 확인할 수 있는 사후 정보였으며 판매 가격 결정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특히 올해 3월 가격담합 혐의에 대해선 “경쟁사 관계자의 일방적인 진술에 기초한 것”이라며 담합 사실을 부인했다. 정유업계에서는 향후 공정위 전원회의 심의 과정에서 두 정유사의 장기간의 정보교환이 실제 휘발유·경유·등유 가격 결정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와 올 3월 입금가 합의를 뒷받침할 증거를 공정위 심사관이 얼마나 확보됐는지가 쟁점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검찰에 이어 공정위까지 정유업계 압박에 나서면서 석유 최고가격제에 따른 정유사 손실 보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정부는 미국·이란 전쟁 발발 직후인 지난 3월 13일부터 정유사의 도매 판매 가격을 묶고 대신 그로 인한 손실을 세금으로 보전해 주기로 했다. 정유업계의 담합 혐의가 인정될 경우 정유사들의 손실 추정액도 그만큼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검찰은 올 7월 4대 정유사를 기소하면서 “석유 최고가격제에 따라 예비비가 적절히 쓰이도록 산업통상부에 관련 자료를 제공하겠다”며 손실 보전 문제를 지적했다. 석유 최고가격제로 막대한 손실을 봤다는 정유사의 주장이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산업부는 석유 최고가격제에 따른 정유사의 손실을 보전하기 위해 예비비 4조2000억원을 편성한 상태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손실 보전이 지나치게 축소되면 주주에 대한 배임 소지가 발생할 수 있는 만큼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보형 기자 kph21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