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10월 14일 10:57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지난 한 달간 회계법인의 변화가 눈에 띈다. 여러 대형 회계법인의 파트너들이 모인 저녁식사 자리에서 대화의 절반 이상이 AI 였다. 마침 각 법인의 정기 연수가 한창이었는데, 참석자들은 공히 연수에서 가장 비중 있게 다룬 주제가 AI 라고 했다. 필자가 소속된 법인은 1 박 2 일의 연수 전체를 AI 로 채웠다.
변화는 아래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연수 과정의 설문에서 구성원의 상당수가 이미 개인적으로 AI 를 업무에 쓰고 있다고 답했다. 경영진은 방향을 고민하고, 현장은 이미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변화를 들여다보면, 단순히 일하는 도구가 바뀌는 것 이상의 일이 보인다. 회계법인의 핵심 사업(Core Business)을 지탱해 온 기반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감사 프로그램을 AI 가 만드는 시대회계법인의 Core Business 는 감사다. 회계법인 간 경쟁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감사 품질이다. 그리고 각 법인은 수없이 진행되는 감사의 품질을 유지하는 중요한 기반으로 저마다 감사 프로그램(Audit Program)을 개발해 활용해 왔다. 어떤 계정에서 어떤 위험을 보고, 어떤 절차로 어떤 증거를 모을 것인가. 이 설계도에는 수십 년간 쌓인 감사 경험과 실패 사례, 산업별 위험 요인이 녹아 있었다. 특히 대형 회계법인은 제휴한 글로벌 네트워크와 공동 개발한 감사 프로그램을 어디서나 같은 수준의 품질을 보장한다는 브랜드 가치를 지키는 핵심 수단으로 활용해 왔다. 반면 중소형 회계법인의 경우, 이러한 감사 프로그램을 체계적으로 갖추지 못한 것을 품질 관리의 약점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법인들은 이를 외부에 쉽게 공개하지 않았고, 신입회계사의 교육은 이 감사 프로그램의 사용법을 배우는 데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제는 사정이 다르다. 감사기준과 공개된 지침을 학습한 AI 에게 업종과 주요 위험을 알려주면, 몇 분 만에 그럴듯한 감사 프로그램을 내놓는다. 계정과목별 경영진 주장과 그에
대응하는 감사 절차, 필요한 감사증거까지 체계적으로 정리해 준다. 실제로 현장의 회계사들은 이미 이렇게 만든 프로그램을 초안으로 쓰고 있다. 일부 AI 도구는 주어진 감사증거를 테스트하고 문서화하는 일까지 해낸다.
필자는 AI Audit 의 시대가 오면 큰 투자가 가능한 대형 회계법인과 그렇지 못한 중소형 회계법인 사이에서 품질 관리와 감사 수행의 격차가 더 커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적어도 감사에 관해서는 그 생각이 틀렸다고 고백해야겠다. 오랜 시간 법인의 안쪽에 보관되어 온 자산이 이제는클릭 몇 번으로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것이 되어 가고 있다. AI 가 감사 프로그램을 대신 만들어 주고, 큰 투자 없이도 AI 를 활용한 도구를 개발할 수 있게 되면서, 이 영역에서는 대형 법인과 중소형 법인 사이의 격차가 오히려 좁혀지고 있다. 노하우가 흔해지고 있다여기서 주목할 점은 회계법인의 감사 프로그램 하나가 아니다. 많은 기업이 가치의 중요한 원천으로 여겨 온 '노하우(Know-how)'라는 자산의 성격 자체가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노하우는 말 그대로 '어떻게 하는지 아는 것', 곧 무언가를 만들고 이루어 내는 방법에 관한 지식이다. 그동안 노하우가 값진 이유는 조직이 이를 배타적으로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노하우를 쌓으려면 오랜 시간과 비용이 들었고, 일단 쌓인 노하우는 그 조직의 문서와 숙련자의 머릿속에 머물러 밖에서는 손에 넣기 어려웠다.
노하우가 어떻게 무너지는지 보려면 먼저 노하우를 두 층으로 나누어 볼 필요가 있다. 철학자 마이클 폴라니(Michael Polanyi)는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안다"고 했다. 사람이 아는 것 가운데 일부만이 말이나 글로 옮겨진다는 뜻이다. 이처럼 글이나 말로 옮길 수 있는 지식을 형식지(Explicit Knowledge), 몸에 배어 있어 말로 다 옮기기 어려운 지식을 암묵지(Tacit Knowledge)라고 부른다. 감사로 말하면 감사 프로그램, 체크리스트, 업종별 위험 목록은 형식지다. 반면 회계자료를 넘기다 어느 숫자 앞에서 '뭔가 이상하다'고 멈추는 감각, 피감사회사 담당자의 머뭇거림에서 위험을 읽는 눈은 암묵지다. 회계법인의 감사 프로그램이 귀했던 것은, 수십 년간 숙련자들의 암묵지를 형식지로 정리해 담아낸 결과물이었기 때문이다.
AI 는 형식지부터 무너뜨리고 있다. 기준서, 지침, 교재, 수많은 사례처럼 글로 적힌 노하우는 AI 가 이미 학습했거나 곧 학습할 것이다. 성실하게 정리되고 체계화된 노하우일수록 역설적으로 더 빨리 범용재(Commodity)가 된다. 감사 프로그램이 바로 그런 경우다.
더 주목할 것은 암묵지마저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미국 스탠퍼드와 MIT 연구진이
고객상담원 5 천여 명을 분석한 연구에서, AI 도구를 쓴 신입과 저숙련 상담원의 생산성은 34% 높아졌지만 숙련 상담원에게는 효과가 미미했다. 연구진은 AI 가 우수 상담원들의 요령을
신입에게 퍼뜨린 결과로 해석했다. 숙련자가 오랜 경험으로 몸에 익힌 감각까지 AI 를 통해
전수되기 시작한 것이다.
노하우가 쓸모없어진 것이 아니다. 흔해졌을 뿐이다. 그리고 흔해진 것은 더 이상 경쟁력이 되지 못한다. 법률 서면의 표준 조항, 컨설팅의 분석 틀, 제조 현장의 작업 표준도 마찬가지다. 문서로전수되던 지식은 모두 같은 길을 걷고 있고, 노하우가 감사 프로그램 등으로 조금 더 많이 표준화된 회계법인은 조금 먼저 겪고 있을 뿐이다.
물론 기업의 가치가 노하우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반도체 기업의 경쟁력은 공정 노하우와 함께 수십조 원 규모의 생산 설비, 대량 생산에서 오는 규모의 경제, 오랜 시간 쌓아 온 공급망과 고객 관계가 함께 만든다. 노하우가 흔해져도 설비와 규모는 쉽게 복제되지 않는다. 반면 회계·법률·컨설팅 같은 전문서비스 기업에는 공장이 없다. 자산의 대부분이 사람과 그들이 아는 것이다. 노하우가 흔해지는 충격이 이들에게 가장 먼저, 가장 직접적으로 닿는 이유다.
그렇다면 노하우가 흔해진 시대에 무엇이 남고, 기업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다음 (下)편에서 이어서 살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