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물’이란 평가를 받았던 미국의 대표 ‘올드 브랜드’들이 재조명받고 있다. 패스트푸드 업체 버거킹부터 의류 업체 랄프로렌과 빅토리아시크릿, 스마트폰의 상징이었던 블랙베리가 대표적이다. 공통점이 뭘까. 과거 성공 DNA 중에서 ‘절대 버려서는 안 될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시대에 맞게 바꿨다는 점이다.
○햄버거 본질에 집중한 버거킹
최근 미국에서 햄버거 왕좌에서 밀려났던 버거킹이 부활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맥도날드와 함께 미국 패스트푸드 시장을 양분했던 버거킹은 지난 수년간 웬디스 등 경쟁사에 밀렸다. 하지만 최근 실적은 달라진 분위기를 확인할 수 있다. 올해 2분기(2026년 4~6월) 미국 버거킹의 동일점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8.5% 증가했다. 1분기 증가율 5.8%보다 성장 속도가 더 빨라졌다. 올 상반기 조정 영업이익은 1억3700만달러로 전년 동기보다 약 13% 늘었다.
비결은 의외로 단순하다. 새로운 사업을 찾는 대신 다시 ‘버거킹다운 것’에 돈을 쓰기 시작했다. 2022년 시작한 버거킹 부활 전략의 이름은 ‘불꽃을 되찾다(Reclaim the Flame)’다. 대표 햄버거 제품인 와퍼를 전면에 내세우고 노후 매장을 고쳤다. 주방 장비와 서비스, 디지털 주문 시스템에도 투자했다. 2028년 말까지 예정된 투자액은 최대 7억달러. 화려한 신사업 대신 햄버거와 매장이라는 외식업의 기본으로 돌아간 것이다.
랄프로렌의 부활도 관심을 끈다. 2027 회계연도 1분기(2026년 4~6월) 매출은 20억달러로 전년 대비 14% 증가했다. 환율 영향을 제외해도 13% 늘었다. 북미 매출은 13%, 아시아 매출은 24% 증가했다. 특히 ‘미국 브랜드의 무덤’으로 불리는 중국 매출이 40% 이상 급증했다.
가장 눈에 띄는 수치는 평균 판매단가다. 랄프로렌의 글로벌 DTC(소비자 직접판매) 사업에서 평균 판매단가(AUR)가 15% 늘었다. DTC 동일점 매출은 14% 증가했다. ‘가격을 15% 높이고도 매출이 14% 늘었다’는 얘기다. 단순한 판매량 회복보다 브랜드의 가격 결정력이 살아났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비결은 ‘할인 퇴출’이다.
브랜드 정체성을 살린 점도 실적 회복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한 것으로 분석된다. 랄프로렌은 과거 과도한 할인과 점포 확대로 희석됐던 ‘프리미엄’이란 브랜드 이미지를 복원하는 데 주력했다. 폴로 셔츠, 케이블(꽈배기) 니트, 프레피 스타일 의류 등 기존의 상징적인 제품과 ‘미국식 라이프스타일’이라는 브랜드 정체성을 강화하고 있다. 젊은 고객을 잡으려고 젊은 브랜드를 흉내 낸 것이 아니라 ‘랄프로렌답게’ 변하면서 젊은 소비자가 돌아왔다.
○‘섹시’ DNA 살렸지만 다양성·포용성은 유지
여성 속옷으로 유명한 빅토리아시크릿의 2026 회계연도 2분기(2026년 5~7월) 매출은 16억1110만달러로 전년 대비 10% 증가했다. 동일 점포끼리 비교한 매출도 9% 늘었다. 상반기 누적으로 매출은 전년보다 12.7% 증가했다. 실적의 질도 개선됐다. 2분기 조정 영업이익은 1억2400만달러로 전년 동기(5510만달러)에서 약 125% 늘었다. 회사는 연간 실적 전망도 높였다. 2026 회계연도 매출 전망을 71억~71억8000만달러, 조정 영업이익 전망을 5억6000만~5억9000만달러로 상향했다. 힐러리 슈퍼 최고경영자(CEO)는 “상품 혁신과 브랜드 정체성, 마케팅 등이 함께 작동하면서 신규 고객이 늘고 시장점유율을 높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빅토리아시크릿은 1990~2000년대에 ‘엔젤스’로 불린 대형 패션쇼를 앞세워 세계적인 란제리 브랜드가 됐다. 하지만 2010년대 후반 들어 ‘획일적인 미의 기준을 내세운다’는 비판이 커졌다. 패션쇼는 2018년을 마지막으로 중단됐다.
회사는 포용성과 다양성을 크게 강조하며 브랜드 이미지를 바꾸려 했다. 이 과정에서 “그래서 빅토리아시크릿이 다른 란제리 업체와 무엇이 다른가”라는 의문이 제기됐다. 2024년 8월 선임된 힐러리 슈퍼 CEO는 ‘브라 경쟁력 강화’, ‘브랜드 이미지와 판매전략 재정립’ 등을 앞세워 부활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섹시·글래머’라는 고유 DNA를 다시 전면에 내세웠다. 하지만 ‘섹시하다’라는 획일적인 이미지 대신 ‘다양성’을 앞세우는 데 주력했다. 과거 이미지를 완전히 없애기보다 핵심 상품과 ‘빅토리아시크릿답다’는 브랜드 이미지를 현대적으로 복원하는 쪽으로 방향을 수정한 것이다.
○‘보안’과 ‘신뢰’ 이미지 살린 블랙베리
블랙베리의 부활은 ‘사업 재창조’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스마트폰의 대명사였던 블랙베리가 자동차 소프트웨어(SW) 기업으로 부활하고 있다. 손에 들고 다니던 블랙베리폰은 사라졌지만 전 세계 자동차 2억7500만 대 이상에 블랙베리의 SW가 들어가 있다.
핵심은 SW ‘QNX’다. QNX는 블랙베리가 자체 개발한 스마트폰 기술이 아니다. 당시 사명이 리서치인모션(RIM)이었던 블랙베리는 2010년 6월 QNX 소프트웨어 시스템을 2억달러에 인수했다. 당시에는 QNX 기술을 자사 제품에 활용하기 위한 투자였다.
현재 QNX는 자동차와 산업 장비 등에 사용되는 실시간 운영체제(RTOS)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RTOS는 PC의 윈도나 스마트폰의 안드로이드처럼 각종 프로그램이 작동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다는 점에서는 일반 OS와 같다. 하지만 역할은 조금 다르다. 자동차에서 브레이크나 첨단운전자보조시스템(ADAS), 디지털 계기판처럼 안전과 직결된 기능은 특정 명령에 반드시 정해진 시간 안에 반응해야 한다. 스마트폰 앱처럼 순간적으로 멈추거나 느려지는 것을 허용하기 어렵다.
QNX는 이런 환경에서 여러 SW가 안정적이고 예측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작동하도록 ‘밑단을 받치는’ SW다. 블랙베리는 QNX를 자동차뿐 아니라 각종 산업용 장비를 위한 ‘기본 SW’라고 정의한다.
블랙베리는 정부와 기업 고객에게 인정받았던 ‘보안’과 ‘신뢰’라는 DNA를 남기고 스마트폰 전성기에 인수했던 QNX를 새로운 성장축으로 키웠다. 한때 사람들이 손에 들고 다니던 블랙베리는 사라졌지만 이제 블랙베리의 소프트웨어는 자동차 안에서 보이지 않게 작동한다.
블랙베리의 2027 회계연도 2분기(2026년 6~8월) QNX 매출은 8030만달러로 전년 동기보다 27% 증가하며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QNX 조정 EBITDA도 2900만달러로 41% 늘었다. 회사 전체 매출은 1억6330만달러로 26% 증가했고 조정 EBITDA는 4700만달러로 81% 뛰었다. 블랙베리는 6개 분기 연속 GAAP 기준 순이익 흑자도 이어갔다.
뉴욕=황정수 한국경제 특파원 hjs@hankyung.com